이은지 ㅣ 문학평론가
브래디 미카코의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일본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저자가 가난한 아이들을 무료로 맡아주는 탁아소에서 보육사로 일한 경험을 담고 있다. 복지정책을 대폭 늘리던 노동당 집권기에는 사회를 지탱하는 작은 오아시스 같던 탁아소가 보수당의 집권으로 재정 지원이 삭감되면서 황폐해져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 정치의 변화가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긴축재정으로 하층민의 보육 환경은 악화되고, 중상류층은 자신의 아이들이 가난한 아이들과 같은 시설을 이용하는 것을 점점 더 꺼리게 된다. 심지어 이민자들도 극빈층 영국인들을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라고 부르며 기피한다. 공영 주택지에 사는 질 나쁜 젊은이들을 일컫는 ‘차브’(Chav)라는 말도 있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을 분류하여 지칭하는 것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리네 아이들이 경제 형편에 따라 서로를 구분 짓는 ‘창조적’인 표현들은 언론을 통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소개된 ‘개근거지’는 학기 중에 수시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아이들과 달리 형편이 되지 않아 꾸준히 학교만 다니는 아이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한데 영국에는 차별적 표현이 등장하게 된 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는 표현 또한 있어 눈길을 끈다. 중산층 아이들이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교육받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을 ‘소셜 레이시즘’으로, 이로 인해 계층 간 단절이 심화되는 현상을 ‘소셜 아파르트헤이트’로, 가난한 이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 부유한 지역에는 부유한 계층만이 남게 되는 현상을 ‘소셜 클렌징’으로 정의하는 식이다.
위의 표현들은 서구의 유서 깊은 인종차별의 역사를 연상시키니 그 또한 고약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없는 성찰의 언어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계급격차가 계급차별로 심화되는 현상을 문제적으로 진단하고 사회적 의제로 삼아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의 유무를 보여주지는 않는가? 우리에게는 오로지 ‘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은 증발되고 감정의 차원을 부각하는 단어만이 횡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혐오의 프레임을 통해서는 차별적 표현이 사용되는 현실에 경악하거나, 그런 표현을 발명하고 사용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도덕적 심판의 굴레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연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저자의 이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은 토니 블레어 정권 당시 외국인 보육사를 고용하는 보육원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식으로 다양한 인종이 함께하는 보육 환경을 정책적으로 장려했다. 저자도 그 덕분에 보육사로 일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계급도 인종도 초월하여 어우러지고 때로는 서로 다투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보육사들은 지원이 끊긴 뒤에도 이 건강한 토양을 지키기 위해 의기투합하지만, 땅이 점차 얼어붙고 쪼그라드는 것을 어쩌지는 못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이웃과 부대끼며 실천하는 일상의 정치도 제도정치와 긴밀히 교호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수확을 이룰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제도정치와 시민사회의 간극을 아직 해소하지 못한 우리 사회가 내디뎌야 할 다음 걸음에 작은 지침이 되어준다. 제도정치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움직임에 의연히 맞서야 하는 이유가 먼 나라의 보육일지에 담겨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