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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인쇄된 기억 / 김진해

등록 2020-03-15 17:58수정 2020-03-16 02:05

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애가 닳고 약이 올라 그 단어 주변을 계속 서성거린다.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입에 굴렸다가 뱉어내고, 비슷한 뜻의 표현을 되뇌면서 추격한다. 가리키는 대상이 구체적이고 협소할수록 더 빨리 사라진다. 그래서 이름(고유명사)을 가장 먼저 까먹는다. 그다음이 일반명사, 형용사이고 동사가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머리에 구멍이 숭숭 나고 있고 내 안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챈다. 어딘가 막히고 끊어지고 사라져 가고 있다. 늙는다는 건 말을 잃는 것. 우리 어머니도 말년에 말을 잃어버렸다. 말동무가 없던 게 큰 이유였지만 스스로를 표현할 힘도 잃어버렸다. 나도 단어를 잃어버림과 맞물려 점점 완고해지고 있다. 완고하다는 건 약해졌다는 뜻.

일반적으로 실어증의 원인을 ‘망각’에서 찾지만, 프로이트는 정반대로 해석한다. 실어증은 망각이 아니라 ‘심화된 기억’이라는 것이다. 특정 시기에 대한 기억만 강렬하게 남고 나머지는 사라진 결과이다. 언어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은 같은 말을 눈치껏 달리 표현하거나 고친다.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직조한다. 말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은 고체처럼 하나의 기억에 사로잡혀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한다. 백오 세의 우리 할머니가 ‘○○는 왜 안 와?’, ‘우리 집엔 언제 가?’라는 말을 한자리에서 수십 번 반복하는 것도 그의 기억에 사람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인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기억에는 어떤 말이 인쇄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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