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욱 ㅣ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
재난기본소득의 ‘끝과 끝’
‘사회적 거리두기’ 대신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세계 곳곳에서 제기된다. 거리두기로 방역이 될지언정 치유가 될 순 없다. 치유는 울력걸음으로 가능하다. 한국선 일찌감치 그 거리를 벌이고자 했고, 또한 일찌감치 연대로 그 거리를 메우고자 한 흔적들이 있다. 마스크 양보, 광주-대구 달빛동맹, 숱한 자원봉사자들…. 연대의 꼭짓점에 ‘재난기본소득’이 목하 자리잡고 있다. 진보개혁 진영 모두 한목소리를 내진 않는다. 이른바 ‘재난기본소득’과 더 오래된 ‘기본소득’ 두 쟁점에 대해 가장 방어적인 논거와, 가장 공격적인 논거를 함께 들어본다. 이번 추경으로 종료될 의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재난이 물러가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보건상의 위기지만, 이제 경제위기도 걱정이다. 지금도 소비 위축으로 자영업자, 저임금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의 생계 곤란이 큰데, 경제 위기까지 덮쳐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대통령의 말처럼 “전례 없는” 대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의 1차 추경안은 그 규모가 전례 없지 않을뿐더러 건물주 지원, 승용차 개별소비세 감면 등 코로나19의 직접 위기계층과 관련이 낮은 내용이 포함됐다. 이에 차라리 ‘재난기본소득’을 주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재명·김경수 지사를 시작으로 박원순 서울시장, 김부겸 의원 등 여당 정치인, 기본소득당, 미래당, 시대전환과 같은 신생 정당, 이재웅 쏘카 전 대표와 민주노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이 재난기본소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과 정치인들이 말하는 재난기본소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호하다. 김경수 지사는 전 국민에게 100만원을, 이재웅 전 대표는 소상공인·비정규직·실업자 등에게 50만원을, 박원순 시장은 중위소득 이하 가구에 60만원의 현금 또는 상품권을, 김부겸 의원은 대구·경북 지역 취약계층에게 우선 지원을 요구했다. 재난기본소득이라는 말로 묶여 있지만, 금액도 대상도 지급 방식도 다르다. 공통점은 ‘재난 피해자에 대한 직접 소득지원’이라는 점 정도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기본소득’이 기존 제도와 다른 특성으로, 보편성(모든 공동체 구성원에게), 무조건성(자산 심사나 노동조건 없이), 개별성(가구가 아닌 개인 단위로)을 든다. 다른 조건들도 있지만 이 세 가지만 따져봐도 지금 재난기본소득이라고 하는 방안들의 상당수는 기본소득이 아니다. ‘모든 국민에게 100만원’을 제시한 이재명·김경수 지사와 민주노총의 제안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제안은 취약계층을 선별 지원할 것을 제시하고 있어 재난기본소득보다 ‘긴급재난지원’ 또는 ‘긴급재난수당’ 정도로 말해야 한다.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사실 중요하다. 당장 ‘재난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이 언론에 오르내리자 보수 야당·언론들은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공격하고 있다. ‘재난 피해자에 대한 직접지원 필요성’만 합의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기본소득에 대한 정치적 입장’까지 합의해야 할 상황이 됐다. 언론이나 정치인들에게는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이 화젯거리를 만들기에 좋을지 몰라도, ‘전 국민에 대한 무조건 지급’을 고집할 게 아니면 굳이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으로 정치적 합의를 더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다. 기본소득보다는 긴급재난지원이 훨씬 더 합의하기 쉬우며, 지원의 긴급성에 부합하는 명칭이다.
명칭을 떠나 재난 대책의 실효성에서도 기본소득이 가장 좋은 방안인지는 의문이다. 재난으로 인해 어려움이 큰 소상공인, 저임금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실업자, 저소득층 등에 대한 직접 소득지원은 긴요하다. 이들에 대한 직접지원은 사회적 기본권 측면에서 정당하고, 소비 위축에 대한 대응 측면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전 국민 대상 현금 지급은 상대적으로 효율성이 떨어진다. 동일한 예산을 전제했을 때, 지원이 더 필요한 이들에게 돌아갈 자원이 상대적으로 급박하지 않은 이들에게 돌아간다. 물론 지금은 기존 정부 추경안보다 과감한 대책이 요구되며, 재난예산을 과감히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재난 대책에는 현금수당 외에도 많은 정책이 있으며, 과감하게 증액하더라도 한정된 예산에 대한 우선순위는 있어야 한다.
무상급식을 놓고 벌어졌던 ‘보편복지 대 선별복지’ 논쟁에서 보편복지 입장은 보편복지로 중산층까지 포괄하는 사회적 연대를 구축해야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도 커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개별 복지 프로그램 모두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복지제도 전체는 보편성을 지향하되, 각각의 프로그램은 개인, 가구, 집단의 상이한 욕구에 대응해야 한다. 더구나 지금 같은 재난 상황에서 현금 지급 대상이 전 국민이 아니라고 해서 사회적 연대가 낮아질 가능성은 적다. 물론 지원이 필요한 이들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행정절차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긴급한 지원인 만큼 어려움을 겪는 모두에게 신속하고 충분하게 지원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처럼 꼼꼼한 자산 조사가 아닌, 직업이나 소득, 혹은 지역 정도만 고려한 ‘느슨한 선별’을 통해 포괄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신속성과 효율성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기본소득은 기술 변화가 인간의 노동을 주변화할지 모르는 미래에 대비해 우리 사회의 분배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아이디어다. 그러나 기본소득에 들어가는 재원 대비 효과를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적합성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이견이 있으며, 그 실행에 앞서 다양한 검토와 논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을 생략한 채, 재난으로 인해 ‘정책의 창’이 열렸다는 이유로 덜컥 도입하는 것은 앞으로의 기본소득 논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재난도 평등하지 않다. 코로나19도 누군가에게는 외출을 못 하는 불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절박한 위험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어려움이 큰 이들에게 가장 긴급하고 충분하게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사회정책을 만들 때도 핵심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