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 ㅣ 사회정책팀 기자
“조금만 빨리 태어날걸…. 그럼 바로 투표장으로 달려갈 텐데.” “야, 됐어. 그래도 우린 첫 투표가 대통령 선거야!”
지난달 21일, 서울 시내 한 고등학교 3학년 4명을 한자리에서 모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올해부터 선거연령이 만 19살에서 만 18살로 낮아졌지만 이들 가운데 4월15일 총선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학생은 2002년 3월생 1명뿐. 8월생 2명과 11월생 1명은 첫 투표가 총선이 아니라 대선이면 더 좋은 것이라는 ‘신박한’ 논리를 앞세워 아쉬움을 달랬다.
입시 공부에 치여 고단할 고3 학생들이 이처럼 투표에 열의를 보이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들은 고1이던 2018년 사단법인 징검다리교육공동체가 주관한 모의선거 교육에 참여해 교육감을 직접 뽑아본 경험이 있다. 이들의 경험이 특별한 이유는 아직 한국의 모의선거 교육이 걸음마 수준에 머무는 탓이 크다. 해당 모의선거 교육 참여 학생은 이들을 포함해 전국 4000여명 정도. 그해 전국 초·중·고 학생 수가 558만여명이니 전체의 0.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다.
당시 서울시교육감 후보는 조희연, 박선영, 조영달 등 모두 3명. 학생들은 모의투표 전, 실제 후보들의 공약집을 교재 삼아 모둠토론을 하고 후보들의 ‘아바타’(분신)가 되기도 했다. 각 반에서 학생 3명을 뽑으면 이 학생들이 후보들에 ‘빙의’해 정견 발표, 토론 등을 하는 식이었다. 당시 아무개 후보의 아바타를 맡았던 한 학생은 “실제 후보들의 토론회 영상을 봤는데 동문서답을 너무 많이 해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솔직한 후기를 들려줬다.
이들이 경험했던 모의선거 교육을 올해 다시 진행하려던 서울시교육청 등의 계획은 끝내 무산돼버렸다. 학생들의 경험담을 채 기사화하기도 전에 말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모의투표에 재차 제동을 걸면서다. 그동안 외부단체 주관으로만 열리던 모의선거 교육은, 올해 처음으로 몇몇 시도교육청의 예산 지원으로 이뤄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2년 전 모의투표를 포함한 모의선거 교육이 가능하다고 했던 선관위는, 사업 주체가 달라진 만큼 재검토가 필요하다며 제지에 나섰다. 그 뒤엔 모의투표에 ‘학생 유권자’가 포함된 것을 문제 삼았다. 교사가 유권자의 지지 의사를 조사하는 것은 공직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다 지난달 6일엔 유권자가 아닌 학생을 상대로도 모의투표를 진행할 수 없다고 했다.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교육청 또는 교원 주관하에 모의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행위 양태에 따라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행위에 이르러 공직선거법에 위반될 수 있다”는, 비문에 가깝게 복잡하고 모호한 문장이 그 근거였다.
교육단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 양태’가 문제가 되는지를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선관위는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그 대신 선관위는 같은 이유를 들어, 교육청·교원은 모의투표를 직접 주관하는 것은 물론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모의투표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해선 안 된다고 쐐기를 박았다. 서울시교육청이 한 질의에 지난 6일 답변을 보내면서다. 뭐가 문제인지 명쾌하게 밝히지는 못한 채, 앵무새처럼 같은 문장만 반복한 것이다.
그런데도 선관위는 비판의 화살을 피해 가고 있다. 장기간 개학 연기로, 이제는 선관위가 모의선거 교육을 하라고 해도 못할 지경이 된 ‘코로나19 정국’이 모든 이슈를 집어삼킨 덕분이다.
하지만 선관위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선관위의 ‘몽니’로 우리 사회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는 “올해야말로 참여의 주체가 된 학생·청소년의 위상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를 논의할 적기였다”며 “선관위가 논란을 원천봉쇄하는 식으로 보수적으로 대응하면서 그 기회를 다 놓쳐버렸다”고 꼬집었다. 선관위는 ‘만 18살 선거권 시대’ 원년에 어떤 궤적을 남기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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