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지 ㅣ 문학평론가
신천지 대구교회를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늘어나면서 한동안 세계 각국은 한국을 ‘무차별적으로 차별’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확진자 수가 폭증하면서 상황은 아주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서구 사회에서도 코로나19 사태에 정치적, 의료적으로 완벽하게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인터넷을 통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 유럽도 별거 없네’ ‘선진국도 별거 없네’.
이러한 반응은 나에게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 문학을 전공했던 나는 바로 그 외국에 대한 우월의식에 빠진 이들을 숱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좀 살다 왔다고 마치 자신이 그 나라의 2등 시민인 양 으스대는 사람, 그 나라를 무슨 지상낙원인 양 찬양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얻은 것은 그런 외국이 정말 좋은 곳이구나 하는 인식이 아니라, 특정 문화나 인종 우월주의를 소비하는 사람이 자기와 주변을 얼마나 스스로 식민화하고 황폐화하는가 하는 깨달음이었다.
당시 나는 국내에서 대학을 다녔기에 그러한 우월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꽤나 괴로웠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과시가 알량하고 가소로울 따름이다. 미국이나 유럽이나 별거 아니네 하는, 일종의 개안을 경험하고 있는 시민들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내가 나이를 좀 더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동안 숱한 어려움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여러모로 성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개인적 차원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면, 사회적 차원에서는 우리 모두가 동등한 시민임을 일깨워준다. 바이러스는 공평하다.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침투한다. 또한 바이러스 앞에서는 시민으로서 의무 또한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당신이 좀 잘산다고 해서, 백인이라고 해서, 혹은 특정한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져야 할 책임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이렇듯 바이러스의 전 지구적 확산은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가 똑같은 인간임을 확인해준다.
한편 어디로든 침투하는 이 바이러스는 자본에 빗대어볼 수도 있다. 더 싼 노동력과 더 수익성 있는 지대를 찾아 국경을 마구 넘나드는 자본을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기 어렵게 되면서, 자본만큼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없는 원주민들은 지속해서 고통받고 있다. 이러한 자본을 빼닮은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는 비슷한 무력감을 느낀다. 세계를 그럴듯하게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인상을 주던 기구들은 코로나19가 활개 치는 이 난리 속에서 정작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고작해야 ‘사회적 거리’를 ‘물리적 거리’로 고쳐 말하자는 말이나 늘어놓을 뿐이다.
마셜 매클루언의 말대로 전 지구가 하나의 마을처럼 여겨질 만큼 심리적 거리가 좁혀진 오늘날, 코로나19 사태는 국경 안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제 마당의 텃밭을 가꾸는 것을 뜻하게 되었음을 환기해준다. 저마다 자신이 돌볼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새삼 각별해진 요즘, 인간이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물리적 범위로서 ‘국가’라는 경계를 다시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