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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설 곳 없는 이들의 정치 / 정환봉

등록 2020-04-05 18:20수정 2020-04-06 14:29

정환봉

사건팀 기자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하는 과정을 다룬 웹툰 <송곳>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인 노무사 구고신이 노동법 강의 중 “노동운동 10년 해도 사장 되면 노조 깰 생각부터 하게 되는 게 인간”이라며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말라”며 던진 말이다.

구고신의 대사가 울림을 가지는 것은 이 말이 노동운동가와 사장의 역학을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어서다. 세상만사 어디에 대입해도 구고신의 말은 설득력을 가진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갖느냐에 따라 악당과 순교자가 나뉘고 정의와 불의가 갈린다. 당장 지난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때도 서초동과 광화문의 시민들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풍경은 서로 전혀 달랐다. 그러나 이것조차 모두 설 자리를 가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사회엔 ‘설 자리’가 없어 ‘바라볼 풍경’조차 한조각 갖지 못한 이들이 있다.

지난달 31일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총선을 앞두고 선거인 명부에서 ‘성별란’을 삭제해야 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과 긴급구제 신청을 했다. 법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이 다른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이 투표를 포기하는 일을 막아달라는 호소다. 성별이 적히지 않은 학생증이나 국가공인 자격증을 제시하고도 투표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선거인 명부에는 성별란이 있어 투표자의 주민등록상 성별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트랜스젠더 등은 대리투표로 의심받거나 차별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투표를 포기하게 되곤 했다고 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4년 조사를 보면 트랜스젠더 90명 중 24.4%인 22명이 ‘주민등록증 제시가 꺼려져 투표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들의 목소리는 ‘국민을 대표하는 자들’에게 가닿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중국 혐오’가 꿈틀대던 지난달 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중국인 영주권자의 지방선거 투표권을 박탈해야 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지난 1일 마감된 이 청원은 21만5646명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현행 선거법을 보면 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 참여하지 못한다. 다만 영주권 자격을 획득하고 3년이 지난 경우에 한해 지방선거에는 참여할 수 있다.

청원은 영주권자에게 부여된 이 제한적 권리마저 빼앗아야 한다는 요구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청원이 올라올 무렵 인터넷에는 ‘가짜뉴스’ 하나가 퍼졌다. 정부가 1개월 이상 국내에 거주한 중국 동포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긴급 행정명령을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중국인 입국금지 등의 조처를 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의도가 뚜렷한 가짜뉴스였다. 이처럼 한국 사회를 두 갈래로 나눈 정치세력이 마련한 너른 공간에 자리 잡은 ‘몫 있는 자’들은 다른 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설 곳 없는 자’들을 배척하기도 한다. 그들이 제대로 항의할 목소리마저 가지지 못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지난달 “성소수자 문제 등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정당들과 연합은 어렵다”는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의 발언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 국회는 지난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충분치 않지만 그나마 ‘설 곳 없었던 이들’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선해했다. 하지만 섣부른 선해였다. 현실에선 거대정당의 위성정당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렇게 뽑힌 국민의 대표들이 그리는 한국 사회의 풍경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냥 절망만 할 수는 없어 실낱을 붙잡는 마음으로 기대한다. 이번 총선에선 좀처럼 들리지 않던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밝은 귀를 가진 국민의 대표들이 선출되기를. 그래서 4년 뒤에는 설 곳 없었던 이들이 ‘민의의 전당’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기를.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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