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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사채동결·실명제·재난지원과 ‘긴급명령’ / 곽정수

등록 2020-04-12 15:25수정 2020-04-13 02:09

1993년 6월 말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도입을 위해 ‘긴급명령’을 결심했다.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장관에게 비밀 작업을 지시했다. 총리는 물론, 실명제에 부정적인 박재윤 경제수석도 몰랐다.

김 대통령은 8월12일 밤 9시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다. 모든 금융거래가 자기 이름으로만 허용되면서 지하경제가 차단되고 검은돈의 추적이 가능해졌다. ‘하나회’ 청산에 이은 혁명적 조처로 평가받았다.

정부 수립 뒤 16번째 대통령 긴급명령이었다. 이는 헌법 76조에 근거한다. 중대 경제위기에서 국가안보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해 긴급조치가 필요하고, 국회 개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 발동할 수 있다.

긴급명령 15호였던 ‘8·3 긴급 금융조치’도 극적이었다. 1972년 8월3일 자정 직전 박정희 대통령은 통화량의 80%에 이르는 사채를 모두 동결하는 ‘금융 쿠데타’를 단행했다. 정주영 현대 회장 등은 한 해 전인 1971년 6월 청와대를 찾아와 “40~50%의 고리 사채로 기업이 다 죽게 생겼다”고 호소했다. 박 대통령은 김용환 청와대 비서관에 극비 작업을 지시했다. 비밀이 새면 경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었다.

코로나19 대책으로 재난지원금을 긴급명령으로 지급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성사되면 17번째 긴급명령이다. 하지만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회가 열릴 수 없을 때나 하는 것”이라며 부정적이다.

재난지원금 자체는 정부와 여야 모두 찬성이다. 지급 대상이 소득 하위 70%냐, 전 국민이냐 다를 뿐이다. 국회를 못 열 상황도 아니고, 보안도 필요 없다.

하지만 금융실명제와 8·3조치 때도 국회를 못 열 상황은 아니었다. 대통령의 통치행위로, 고도의 보안이 요구된 측면이 강했다.

국민 고통을 고려할 때 지금 관건은 긴급성이다. 정부는 이번주 재난지원금용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인데, 여야가 서두르면 긴급명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설명이다. 정부 관계자는 “여야가 합의하면 3~4일 내 처리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긴급명령 카드를 꺼낸 것은 ‘총선 표심’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곽정수 논설위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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