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막말’이란 없다. 누가 나에게 쌍욕을 하더라도 그 말을 누가 하냐에 따라 막말이 되기도 하고 정겨운 말이 되기도 한다. 겉보기에 아무리 ‘점잖은 말’도 모욕감을 느끼거나 구역질 날 때가 있다. 말보다는 말의 주인이,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상황이 중요하다. 그 덕에 말은 끝없이 변화하고 원래의 의미에서 탈선한다.
어떤 말도 그 자체로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 어원이 속되고 차별적이더라도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효과를 미치지도 않는다. 권력이 개입될 때, 다시 말해 권력을 확인하거나 획득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이용될 때 말은 언어권력이자 경멸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때 말은 누군가를 대변하고 누군가를 동원한다. 그래서 막말은 (눌려 있던 무의식이 드러나는) 말실수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권력이 없다. 비슷한 크기의 상징자본도 없고 파급력 있는 미디어에 쉽게 접근할 수도 없다. 그래서 막말이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않도록 권력을 회수하는 것,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을 회수하는 것, 말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로 막말 생산 집단에 그 말을 되돌려주어 자신들이 한 말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푸념이 되게 해야 한다. 이를테면 다시는 국가가 국민을 내팽개치지 않도록 ‘우리는’ 4·16 세월호 참사, 5·18 광주, 4·3 제주, 그리고 위험의 외주화와 비정규직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 무수한 죽음의 비극과 부조리를 ‘징글징글하게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 뼈까지 발라 먹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