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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헌, 바깥길] 인간의 체온을 지켜야 할 때

등록 2020-04-14 16:35수정 2020-04-15 11:21

일자리의 혹한기는 이미 왔다.
방역 선진국인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봄꽃이 피어나는 것은 아니다.
혹한기가 빙하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땔감을 아낄 시기가 아니다.
빙하기가 오면 땔감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군불을 때어 인간의 체온을 지켜야 할 때다.

2월 중순쯤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세계의 공장인 중국에 빨간등이 켜지면서 그 여파가 심상치 않았다. 중국에서 들려오는 휴업과 해고 소식. 공식적 통계를 확인할 도리가 없으니, 괴이한 풍문처럼 들렸다. ‘왕관’이라는 뜻을 가진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고 은밀했으나, 세상의 왕좌를 간단히 무너뜨렸다.

정작 아우성은 바깥에서 들렸다. 중국에서 물건을 가져오는 기업도, 납품하는 이들도 모두 걱정이었다. 아시아 관광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돌아가는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계절은 봄을 향하고 있었지만, 노동시장은 얼음장 같은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다. 촉각이 예민한 직원들이 분석에 나섰다. 그때만 해도 아시아 국가의 일자리 사정만 들여다보았다. 몇백만 정도의 신규 실업자를 예상했다.

3월 초였다. ‘왕관’ 바이러스는 유럽에 상륙하여 거칠게 몰아붙였다. 아직 거리에 침을 뱉어대는 곳에서나 생기는 ‘아시아 바이러스’라고 알았던 유럽은 속수무책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세계화의 ‘잠시 대기’, 모든 경제적 사회적 활동의 ‘일시적 중지’. 일자리와 생계가 갑자기 그리고 일시적으로 불안해졌다.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방역이 최우선이지만, 이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면 밥벌이도 지켜야 한다. 세상에 있었던 모든 위기가 한결같이 전언하는 교훈이다.

부랴부랴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고용영향을 분석했다. 국민소득(GDP) 영향에 대한 몇가지 시나리오를 근거로 실업규모를 예측했다. 일시적 쇼크 후에 경제와 고용이 회복되는 경우에는 500만명에서 1200만명 정도를 예상했다. 상황은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 분석했는데, 늘 냉정한 예측모델은 2500만명의 신규실업을 예상했다. 피식 웃고 말았다. 2008~09년 금융위기 때의 신규 실업자 수 2200만명을 넘었기 때문이다.

3월 중순께 고용예측 결과를 발표하려 했다. 바이러스는 불길처럼 퍼졌고,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꼭꼭 숨어들었다. 홍보담당 직원이 물었다. 어느 시나리오를 헤드라인으로 발표하면 되느냐고. ‘소심한’ 나는 중간 시나리오를 권했다. 그날 밤 미국에서 300만명 이상이 실업수당을 새로 청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럽에서 들리는 수치도 끔찍했다. ‘불편한 마음’을 따르지 않고 수치의 흐름을 따르기로 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발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발표 당일의 현실은 상상의 최악을 간단히 넘어섰다. 2500만명의 수치도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물론 예측모델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입력한 정보가 애당초 잘못되었다. 우선 경제 쇼크의 규모를 과소평가했다. 이번 위기를 과거의 유행병 위기로 생각했을 뿐, 어설픈 방역으로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가중한 ‘인간의 과오’ 또는 ‘인재’를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을 집에 묶어두는 방역 정책은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악화시켰다. 동시 협공이다. “수요냐 공급이냐” 하는 경제학적 논쟁이 부질없을 정도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진정 ‘글로벌’하다. 대공황에 버금간다는 지난 금융위기 때도 주요 개발도상국은 꾸준히 성장했고 세계경제의 숨통 역할을 했다. 지금은 기댈 숨통은 없고, 모두 산소호흡기를 찾고 있다.

둘째, 바이러스의 지속기간에 대해서도 틀렸다. 적어도 상반기에는 안정될 줄 알았다. 몇년 전에 에볼라로 고생했던 후진국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의료체제를 가진 선진국들이 아닌가. 하지만 초기 방역은 실패했고, 바이러스는 이제 아프리카와 남미로 번지고 있다.

셋째, 고용이 놀라우리만큼 민감하게 반응했다. 통상 실업을 후행지표라고 한다. 경제나 기업활동이 악화되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해고나 휴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봉쇄조치와 함께 초유의 규모로 실업이 생겨나고 있다. 기업들은 예전처럼 경기회복에 대한 신속한 대처를 위해 노동자를 붙들어두려 하지 않는다. 사태가 길어질 것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4월 둘째 주, 고용영향 분석 결과를 새로 발표했다. 노동시장이 악화되어 고용과 실업의 경계도 무너졌다. 일자리를 유지해도 노동시간이 줄고 노동소득이 줄어들었다.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정은 우려의 수준을 넘었다. 앞으로 3개월은 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노동시간 손실이 6.7% 정도 될 것으로 예측했다. 풀타임 노동자가 주당 48시간을 일한다고 가정하면 2억명의 일자리에 해당된다. 고용예측을 발표하면 혹 틀릴까 초조한데, 이번만은 우리가 틀리길 바랐다.

일자리의 혹한기는 이미 왔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온전히 피하기는 힘들다. 방역 선진국인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럴 일 없다고 눈을 감는다고 해서 봄꽃이 피어나는 것은 아니다. 혹한기가 빙하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땔감을 아낄 시기가 아니다. 빙하기가 오면 땔감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군불을 때어 인간의 체온을 지켜야 할 때다.

일자리가 여의치 않으면 소득지원을 서둘러야 한다. 다행히도 많은 나라에서 신속하게 하고 있다. 기본소득 찬반 여부와는 무관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방역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 정책결정 때문에 사람들이 손실을 입고 있다면 사회가 의당 도와야 한다. 시간을 다투는 정책에 규율이니 원칙이니 하는 ‘훈고학’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기업도 도와야 한다. 그동안 경제계는 정부의 파격적 지원을 요구할 때 기업의 고용창출 기여를 내세웠다. 귀한 세금을 써가며 기업을 살린 이유다. 그렇다면 이번에 기업이 정부의 지원을 받을 때 고용유지를 약속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바이러스와의 싸움과 경제위기의 극복은 모두 사람을 우선시하는 일이다. 수백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주식시장이 폭등하는 세상은 아니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는 다를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알지 못한다. 9·11 때와 지난 금융위기 때도 들었던 말이다. 그 후로 변한 것은 별로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위기의 불평등함이다. 위기 전에 고군분투했던 사람은 위기 때문에 더 힘들 것이다. 저소득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가 감당해야 할 몫은 변함없이 클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뮤지컬 <빨래>에 나오는 노래 ‘슬플 땐 빨래를 해’를 처음 들었다. 따스했지만 슬펐다. 일을 못 구하고 잘리는 일상을 서로 격려하면서 버틴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꿈쩍하지 않는다.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라고 노래할 뿐. 누군가 그랬다. 이런 사람들의 젖은 마음을 꺼내서 마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그러길 바란다.

오늘은 4월15일이다.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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