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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불교, 경계를 넘다 / 김진해

등록 2020-04-26 18:38수정 2020-04-27 02:38

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세상은 ‘아사리판’. 한 번도 ‘주인공’으로 살아본 적 없는 ‘건달’은 하는 일 없이 주변에서 ‘걸식’을 하며 살았다. 어느 날 ‘성당’처럼 지은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안을 기웃거렸다. ‘육안’으로도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장로’를 중심으로 ‘신도’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탐욕’과 ‘아집’이 어떻게 ‘세계’를 ‘타락’의 ‘나락’에 빠뜨리는지를 다루고 있었다.

현관문을 두드렸다.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는 다짜고짜 ‘곡차’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집사는 ‘난처’해하면서 교회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배고픈 ‘내색’은 하지 않고 ‘무심히’ 뒤를 따랐다. 집사가 말했다.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립시다. ‘지옥’의 길에서 빠져나와 ‘천당’에서 ‘천사’와 함께 살듯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집착’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오로지 ‘현재’ 일어난 것들을 ‘관찰’해야 합니다.” 건달 왈, “나는 기독교 ‘교리’에 ‘문외한’이지만 ‘선생’의 ‘설교’는 마치 불교 말씀 같구려.” 집사는 웃으며 “모든 건 변하니까요”.

건달은 ‘회심’하여 그 집사를 ‘선생’으로 삼아 ‘제자’가 되었다. 그 후로 ‘차별’ 없는 ‘공생’ 사회라는 ‘제목’으로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어 ‘성자’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다.(*작은따옴표 안의 낱말은 모두 불교와 관련된 일상어이다. 불교용어도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이거나 의역이 많다. 말은 경계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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