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지 ㅣ 문학평론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 이후, 단골 동네 순댓국집을 들러 서울재난긴급생활비 선불카드로 식사비를 결제한 순간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거의 두어 달 만에 처음으로 외식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책으로나 봤던 기본소득을 그 자체는 아니지만 비슷하게나마 실감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삶을 망가뜨렸지만, 대신에 이렇게 기본소득의 시간을 앞당겨주고 있다.
사회주의자와 생태주의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해온 이유는 그 순기능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기본소득은 가사노동을 비롯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각종 ‘그림자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 등 직업 상황이 불안정한 이들의 생계도 뒷받침해줄 수 있다. 자본의 이윤 추구와 기술 혁신 등으로 안정적인 일자리가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노동을 통한 생존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을 기본소득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둘째로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기금과 달리 자신이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가난하거나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행정을 집행하는 측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원 대상을 선정하고 분류하는 물리적, 금전적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상위 30%를 분류하는 데 드는 행정 비용과 상위 30%까지 지급하는 데 드는 비용이 차이가 없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같은 이유에서 기본소득은 복지의 사각지대가 생길 염려가 없다. 내가 들었던 충격적인 이야기는 정부가 청년을 고용하는 기업에 지원금을 풀자 소규모 회사에서 청년을 추가로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멀쩡히 다니던 40~50대 직원을 해고한 뒤에 20대 직원을 고용하더라는 것이다. 이는 정책의 타깃팅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의도한 바와 전혀 다른 효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본소득은 이런 부작용으로부터 자유롭다.
셋째로 기본소득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동일한 금액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민주공화국을 구성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모두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우리가 사회에 기여한 바를 소득의 형식으로 되돌려주는 것으로서, 수혜나 복지가 아니라 엄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우리의 권리로서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몫은 그동안 감세 등의 명목으로 부유층에게 흘러가기 일쑤였다. 물론 기대했던 낙수효과가 증명된 적은 없다. 그저 이데올로기적으로 맹신되었을 뿐이다.
기본소득은 생태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기본소득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가 하는 물음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가령 사치하며 사는 삶을 생존의 조건으로 삼고 기본소득을 책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을 실현한다는 것은 우리의 비대해진 욕망의 크기를 줄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무언가가 필요해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소비하는 행위만을 욕망하도록 부추기고, 부의 불평등과 환경 파괴를 비용으로 지불함으로써 간신히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세계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것이기도 하다. 기본소득의 시간을 사는 것은 한낱 포퓰리즘 따위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돌아보는 것인 셈이다. 우리는 이 시간이 계속 흐르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