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 ㅣ 정치팀장
아버지는 정의당원이다. 1936년 제주생. 오랫동안 열정적인 디제이(DJ) 지지자로 살았다. 대선 투표하러 고향 집에 내려간 1992년 겨울, 아버지는 새벽이 오도록 개표 방송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무세요. 어차피 김영삼이 되는 선거였어요.” 반응은 싸늘했다. “이것만은 알아둬라. 너희 젊은 놈들, 역사에 큰 죄를 지은 거다.” 나는 그 선거에서 김대중을 찍지 않았다.
아버지는 장로교 은퇴 목사다. 육지로 건너와 신학교를 다니며 전도사 생활을 시작한 게 1960년대 초. 초임 교사이던 어머니를 만나 광주에서 결혼했다. 10년 넘게 농촌 사목을 하다 1970년대 말 광주의 변두리 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했다. 교회 성장에 대한 열망이 여느 목회자 못잖았던 듯, 교인들을 설득해 큰길가에 새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1980년 봄, 우리 식구는 예배당 지하의 목사관으로 이사했다. 채 두달이 되지 않아 5·18이 터졌다.
아버지는 매일 도청 앞으로 나갔다. 해 질 무렵 돌아와 어머니에게 시내 소식을 전하는 당신 표정에는 분노와 무력감이 섞여 있었다. “다 잡아 죽이려나 봐. 여학생도 속옷만 입혀 끌고 가더라고. 사람들이 그래. 저놈들이 이 나라 군인 맞냐고.” 군인들이 총을 쐈다는 소식과 함께, 총을 든 시민군들이 동네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교회 주변은 총성이 요란했다.
외곽으로 철수했던 계엄군의 재진입 소문이 돌자 아버지는 나와 형들을 서석동 외가로 보냈다. 교회에서 교전이 벌어지는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 당시 교회는 4층 높이 종탑까지 달려 있어 화순 쪽에서 진입하는 계엄군 움직임을 감지하기 용이했다. 카빈총을 든 시민군들이 예배당을 드나들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지하 목사관으로 불러 밥과 라면을 챙겨 먹였다.
외가에서 하루를 보낸 뒤 집에 왔지만 아버지는 없었다. 점심 무렵 시내를 둘러보고 돌아온 아버지가 말했다. “공무원 놈들, 그 살인자들한테 밥을 지어 먹이고 있어. 도청에 남았던 그 사람들, 다 어떻게 됐을까?”
예배당 완공 뒤 교세는 빠르게 늘었다. 재적 교인이 300명을 넘어가자 아버지는 ‘힘에 겹다’며 담임직을 내려놨다. 개척교회를 시작한 아버지는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 일을 맡아 서울 왕래가 잦아졌다. 집에선 ‘부천서 성고문’이나 ‘녹화사업 의문사’ 등 시국사건 유인물이 자주 눈에 띄었다.
1997년 정권 교체 뒤 아버지의 정치적 선호는 노무현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호남의 민주당 정치인들을 두고선 ‘디제이 팔아 제 잇속 챙긴다’는 쓴소리를 자주 했다. 2009년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 이후로는, 차갑게 거리를 유지해온 진보정당에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제주 4·3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놓은 것도 그즈음이다. 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될 날만 기다리던 할아버지를 할머니가 세차례나 큰돈을 써 빼냈다는 얘기도 그때 들었다. 장터에서 목격했다는 토벌대의 ‘폭도 처형’ 장면은 아무리 애써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무렵 동네 도서관에서 김석범의 <화산도>를 빌려 읽고, 4·3이 언급된 현대사 서적을 틈나는 대로 찾아 읽으며 골똘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나이 들수록 보수화한다는 속설과 달리, 아버지는 해가 갈수록 급진화했다. 2년 전엔 태어나 처음 당적까지 갖게 됐다. 노회찬의 죽음 직후였다. “그 소금 같은 사람들한테, 참 미안하더라.” 아버지가 밝힌 입당 이유였다.
지난주 아버지에게 전화 걸어 ‘총선 결과가 아쉽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담담했다. “4·3 때, 5·18 때 이런 세상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 짧은 침묵 뒤 아버지 말이 이어졌다. “역사라는 게 더딘 듯해도 꾸준히 앞으로 나가는 거더라. 나는 아직도 그 사람들한테 미안하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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