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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부엌, 집의 중심 / 노은주·임형남

등록 2020-05-05 18:13수정 2020-05-06 14:28

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집이라는 공간은 움을 파고 뼈대를 세우며 시작되었다. 그것이 집의 원형이었고 그 중심에 불이 있었다. 사람들은 불 주위에 빙 둘러앉아 먹고 마시거나 피곤한 몸을 뉘었을 것이다. 선사 유적지뿐만 아니라 불과 몇백년 전 유럽의 주거에서도 홀이라는 큰 공간의 한가운데 불이 있었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밥도 먹고 파티도 하고 심지어 별도의 침실이 없이 잠도 잤다고 한다.

공기며 물이며 하다못해 작은 모래알조차 하나라도 없어지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겠지만, 특히 불은 인간에게 무척 중요하다. 사실 인간이라는 덩치가 크지도 않고 힘이 강하지도 않은 종이 지구 생태계의 꼭대기에 올라서게 된 것도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집의 살림을 관장하던 주부에게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잘 보존하다 물려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어떤 집안은 실제로 불씨를 무려 500년 동안 이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지켜주는 신이 바로 조왕신이다.

예전에는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는 삿된 기운이나 잡귀들을 막아주고 집의 평화를 지켜주는 신들이 우리와 함께 산다고 믿었다. 집을 떠받치고 있는 대장 격인 성주신, 화장실에서 머리카락을 세고 있었다는 측신, 우물을 지켜주는 용왕신 등등. 그중에서도 불을 관장하며 탁한 것들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조왕신은 성주신과 더불어 집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

그래서 주부들은 아침이면 일어나 제일 먼저 부엌 선반 위에 정화수를 떠서 바치며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도 이사를 할 때 손 없는 날 밥솥을 미리 가져다 놓는 것도 불을 존중하고 조왕신을 모시는 풍습에서 온 것이라 한다.

왜 갑자기 조왕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요즘 집을 설계하며 느끼는 많은 변화 때문이다. 한동안 집에는 12자 장롱이 들어갈 수 있는 안방과 명절이나 제사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커다란 거실이 필수였다. 부엌은 구석에 끼워 넣거나 음식 냄새가 퍼지지 않도록 아예 문을 닫고 분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거실을 없애거나 식당과 합치고, 부엌을 집의 중심으로 놓아달라는 요구가 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느라 많은 가정에서 그동안 회사나 학교로 바삐 흩어졌던 식구들이 모두 집에 모여 밥을 함께 차려 먹느라, 혹은 밥을 따로 먹어야 해서 무척 힘이 들었다고들 한다. 가족의 또 다른 말인 식구(食口)는 한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21세기의 첨단 문명이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흔들리고 있는 요즘, 식구가 모이고 부엌이 집안의 중심이었던 오래전 주거의 원형으로 회귀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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