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지로 ㅣ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한국뿐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도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시행된 봉쇄(록다운) 조처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한 뒤 세계가 재정비해야 할 모습에 대해 저명한 지식인들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국경 봉쇄 경험으로 내셔널리즘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경고, 빈곤층에 더 큰 감염을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격차와 빈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논의 같은 중요한 지적이 활용되기를 기원한다.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일본이 좋은 방향으로 바뀔 것인지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방사성물질 누출 사고라는 거대한 충격을 받으면서도 일본이 거의 변하지 않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감염병은 일종의 재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슬림화가 진행되기만 했을 뿐, 재해에 대처할 자원의 여유도 없다. 일본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피시아르(PCR·유전자 증폭) 검사 건수는 선진국 중에서 압도적으로 적다. 병원도 증가하는 감염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구급차가 환자를 받아줄 곳을 찾지 못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일본 정부가 각 지역 보건소와 병원의 병상을 삭감해왔던 정책의 결과다.
일본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경험했음에도 원전 재가동이 진행되고 있다. 더구나 원전 건설을 둘러싸고 회계부정을 계속 저질러온 전력회사를 처벌하는 일과 관련해 감독관청인 경제산업성이 절차상 위법을 은폐하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해온 것이 지난달 드러났다. 원전 사고에 대한 반성만은 일본 정부에는 전혀 없다고 말해도 좋다.
어려움과 위기를 경험했다고 자동적으로 정치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위기를 만들어낸 원인을 직시하고 위기에 대응하면서 정치인과 관료가 저지른 실패를 엄격하게 검증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뒤 미국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라는 지도자가 있었고, 영국에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경제학자가 있어서 완전고용을 지향하는 복지국가라는 모델이 탄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서유럽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살육과 파괴를 반성한 프랑스와 독일 지도자들이 유럽통합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국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코로나19 위기 대응책이 지금까지 주효했던 것은, 이전 정권이 세월호 사고 당시 정보를 은폐해 국민의 분노를 산 것에 대한 반성에 근거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정보공개를 철저히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일본도 코로나19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정부의 위기대응 능력을 개선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스스로 실패를 직시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베 신조 정권은 자신들의 실패를 은폐하는 것을 거듭하고 있다. 코로나19 위기가 심각해지기 전 일본에서는 정부의 공금으로 개최한 공적 행사인 ‘벚꽃을 보는 모임’에 아베 총리가 자신의 지지자를 대거 초대해 접대를 했고, 이와 관련된 정치자금 보고에는 허위가 있었다는 의혹이 국회에서 제기됐다. 또한 아베 총리 쪽과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 경영하는 사학법인에 국유지를 부당하게 인하된 가격으로 양도한 사건과 관련해, 양도의 경과를 기록한 공문서를 조작하라는 지시를 받고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재무성 직원의 유서가 공개됐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지만, 코로나19 위기는 이런 정권의 부패와 부정을 덮어버리고 있다.
이 위기 한복판에서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정직하고 성실한 정권을 만드는 것은 정치윤리를 확립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실패에서 배우는 유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도 필수임이 확실하다. 일본의 유권자는 다음 선거까지 아베 정권의 대응 실패를 기억해서 행동으로 이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