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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정의연은 누구에게 답해야 하는가 / 김은형

등록 2020-05-21 18:55수정 2020-05-22 02:38

서울서부지검 관계자들이 21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인 서울 마포구 ‘평화의 우리집’을 압수수색한 뒤 압수 물품을 들고나오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서울서부지검 관계자들이 21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인 서울 마포구 ‘평화의 우리집’을 압수수색한 뒤 압수 물품을 들고나오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정의기억연대(정의연)와 나눔의집의 후원금 운영 논란이 불거지면서 많은 후원자들이 고민에 빠졌다. 10년 전 우연히 나눔의집 청소 봉사를 갔다가 후원 신청을 해 월 3만원씩 내고 있는 친구도 그중 하나다. “회사 그만둘 때도, 애 학원비 부족할 때도 이것만은 안 건드렸는데 말이지….” 하지만 친구는 딱 잘라 후원을 중단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친구의 고민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

운동가가 아니라도 많은 이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위안부 문제는 단순 명쾌한 명분 싸움이 아니다. 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짓밟힌 할머니들의 고된 삶이 마음 아프고, 그분들이 끌어낸 국가 성폭력 이슈의 세계적 반향에 감동하며, 지금의 여성주의와 성폭력 담론이 성숙하고 가지를 뻗어나가는 데 그분들께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정의연과 나눔의집은 별도의 단체이지만 두 단체의 후원자들이 할머니들과 ‘위안부 인권운동’에 보내는 관심과 지지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실망과 안타까움과 근심이 복잡하게 뒤얽힌 심정으로 정의연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이러한 지지자들의 마음을 할퀴는 한 원로 여성운동가의 페이스북 글을 보고 아연했다. 그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출신은 아니지만 “정의연 30년 활동 가치는 30조를 넘는다”는 표어와 함께 “돈만 많이 받으면 된다는 할머니와 가족들을 설득해 진상 규명과 공적 사과 요구를 이끌어내고 이 문제를 교과서에 실리도록 애쓴 이들”이라고 썼다. 정대협에서 정의연으로 이어지는 30년 동안 할머니와 운동가들의 헌신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정의연의 가치를 부각하기 위해 할머니들을 폄하하는 건 벼랑 끝에 선 정의연을 그 아래로 떨어뜨리는 일이다. 할머니들의 육성 증언이 없었더라면 성립 불가능했을 운동을 옹호하기 위해 할머니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질문을 던지는 지지자들에게 당신들이 뭘 알겠느냐는 식으로 대응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이 운동이 얼마나 독선적이 됐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20일 나온 ‘초기 정대협 선배들의 입장문’을 읽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입장문에 이름을 올린 원로 운동가들은 ‘위안부’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사비를 털어 백방으로 뛰면서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내고, 그분들의 상처에 같이 눈물 흘리며, 지워진 역사를 새로 쓴 분들이다. 글에 나온 대로 할머니들의 용기와 활동가들의 열정으로 “할머니들은 단지 수동적인 피해자로 머물지 않고 활발한 인권운동가가 되었다”는 데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드물다. 정대협 초창기 간사로 시작해 지금까지 활동해온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의 헌신도 부정할 수 없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정의연 사태에 30년간 힘겹게 쌓아 올린 위안부 인권운동의 성과가 무너질 것에 대한 원로들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믿고 기다려 달라는 호소를 받아들일 새도 없이 지금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윤 전 이사장과 정의연이 좀 더 일찍 진솔하게 해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번 사태를 통해 강제동원과 위안부 피해의 역사를 뒤집으려는 세력이 존재한다. 이때다 싶어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의 문제를 교묘히 정의연 쪽에 뒤집어씌우려는 악의적인 준동이 있는가 하면, 위안부 활동과 무관한 할머니 가족과 ‘내용은 모르지만 화가 난다’는 식의 인터뷰를 하거나 서울 마포구 ‘평화의 우리집’(쉼터)에 할머니 한 분밖에 없더라는 저열한 아무말 대잔치 식의 언론 공격도 있다.

정의연과 위안부 운동이 이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위안부 인권운동을 깎아내리거나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은 늘 있어왔고 그저 이들은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을 뿐이다. 그러나 위안부 운동의 주변에는 직접 활동가로 나서지 않아도 애틋하게 바라보고, 고마워하고 지지하는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있다. 정의연이나 나눔의집에 쌓인 후원금도 그걸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정의연과 윤 전 이사장은 이런 사람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야 한다. 그게 위안부 인권운동 30년 역사를 지켜내고 앞으로 더 단단하게 나아가기 위한 길이다.

김은형 ㅣ 논설위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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