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정 ㅣ 사회정책팀장
길 가운데 손수레 노점이 줄지어 있어 평소에도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힘든 좁은 시장통에 ‘정체 구간’이 생겼다. 스무남은 명이 줄을 선 게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는 정육점. 매대 위 저울 옆엔 통나무만한 선홍색 소고기 등심이 덩어리째 놓여 있었고,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차례로 그 고기를 잘라 건넸다. 나만 몰랐던 땡처리라도 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의 손님이 등심을 주문하는 통에 아예 고기를 통째로 꺼내놓은 거였다. 긴급재난지원금 덕분이었다.
긴급재난지원금은 전 국민 몸보신 프로젝트인가. 아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탓에 경제가 돌아갈 수 없는 역대급 재난이 닥쳤으니 이 재난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며 나라에서 긴급하게 지원해준 돈이다. 그렇다면 이 재난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없어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게 돌아가는 게 더 정의로운 게 아닐까.
코로나19 때문에 수입이 끊긴 곳에 사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 기부하면 되는 것 아니냐, 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부가 14조원이 넘는 예산을 집행하면서, 그 결과를 개인의 선의에 맡기는 건 무책임하다.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지원이 돌아가는 결과를 원했다면, 평소엔 조금 부담스러운 소고기를 ‘공돈’ 생긴 김에 사 먹을 사람들까지가 아니라, 그 절실한 사람들이 월세라도 낼 수 있게 대책을 설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애초 소득 하위 70%에게만 긴급재난지원금을 주기로 했다가 전 국민으로 확대한 것을 두고 어떤 이들은 ‘선별복지’를 하려다 ‘보편복지’로 선회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보편복지를 강조하는 이들 사이에선 2차 재난지원금 지급, 기본소득 도입 같은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대책 또는 정책은 무상교육이나 무상급식, 무상의료 같은 보편복지와는 결이 다르다.
의무교육과 급식을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제공하는 이유는 누구나 배워야 하고(교육의 의무) 배우려면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수 의료를 무상으로 이용하게 하자는 건 아프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는 모두에게 닥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영세업체나 하청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평소 열악한 처지에 있던 비정규직 등의 고통은 가중됐지만, 백화점 명품관은 문을 열자마자 문전성시를 이뤘고 서울 아파트 가격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게만 생계급여를 지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경제력이나 노동시장에서의 지위 등 개인이 처한 조건에 따라 대응 능력이 다르므로 ‘보편의 철학’이 작동할 수 없다는 얘기다.
불평등 연구자, 복지국가 운동가들 사이에선 “이러려고 보편복지를 그렇게 주장해왔는지 허탈하다”는 얘기가 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이 지적하듯, 보편복지가 과도하게 강조되면서 정작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는 주변화하고 정체되는 ‘복지 불균등’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보편복지의 토대 위에, 특별히 더 힘든 사람의 버팀목이 될 선별복지가 섬세하고 촘촘하게 짜여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얘기하는 기본소득은 재난지원금과 다를 게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랬다. “한국의 모든 위기 극복 과정에서 격차가 벌어져왔는데, 이번엔 격차가 좁혀져야 한다.” 깊이 공감한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재난지원금 대신, 그리고 ‘한국형 뉴딜’이라며 단기 일자리를 만드는 대신, 근로감독관, 집배 노동자, 장애인 돌봄 노동자처럼 만성적인 인력난을 호소하는 일자리를 대폭 늘리는 건 어떨지. 그래서 안정적이고 질 좋은 일자리로 어느샌가 자취를 감춘 소득주도성장을 실현하고, 사망을 포함한 각종 산업재해와 ‘태움’ 같은 직장 내 괴롭힘을 줄이고, 공공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건 어떨지. 망상이라고? 문 대통령이 또 그랬다. “정책적 상상력에 어떤 제한도 두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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