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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한글의 역설 / 김진해

등록 2020-06-21 16:16수정 2020-06-22 02:35

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국어에 영어가 많이 섞여 있어 걱정인 분들이 많다. 허약한 주체의식이나 문화 사대주의 등 관념적인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문자학의 측면에서 보면 한글이 갖고 있는 역설적 성격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글은 말소리를 작은 조각으로 쪼개어 적을 수 있는 문자라 어떤 말이든 ‘비슷하게’ 표시할 수 있다. 소리만 본뜰 뿐 뜻을 담지 않아 몸놀림이 가볍다. 들리는 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적는다.

한국어로 통하는 한글은 외길인데, 중국어로 통하는 한자는 세 갈래 길이다. 음과 뜻이 한 몸인 한자는 낯선 외국어를 만나면 움찔한다. 음으로 적을지(음역), 뜻으로 적을지(의역), 둘 다 살려 적을지(음의역)를 매번 고민해야 한다.

예컨대, ‘咖啡(카페이)’(커피), ‘巧克力(차오커리)’(초콜릿), ‘喜来登(시라이덩)’(쉐라톤), ‘沙发(사파)’(소파)는 영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电视(뎬스)’(텔레비전=전기+보다), ‘电脑(뎬나오)’(컴퓨터=전기+뇌), ‘电影(뎬잉)’(영화=전기+그림자), ‘手机(서우지)’(핸드폰=손+기계)는 의역한 것이다. 한편 ‘可口可乐(커커우커러)’(코카콜라=입에 맞고 즐기기 좋다), ‘咖啡陪你(카페이페이니)’(카페베네=커피(음)+당신과 함께(뜻)), ‘星巴克(싱바커)’(스타벅스=별(뜻)+벅스(음))는 음과 뜻을 적절히 섞어 만든 것이다.

한글은 쉬운 만큼 외국어가 빨리 들어오고, 중국 한자는 어려운 만큼 천천히 들어간다. 문자는 외국어 수용에 영향을 미친다. 문화 사대주의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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