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원 ㅣ 도쿄 특파원
일본에서 3년3개월여 동안의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최근 귀국했다. 그 기간 매년 참석했던 행사가 몇 가지 있다. 대표적인 행사가 9월1일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리는 간토(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다. 1923년 9월1일 도쿄를 포함한 간토 지역에서 일어난 대지진 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같은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최소한 조선인 수천명이 일본 자경단과 경찰에게 학살당했다. 해마다 9월1일 즈음 간토 지역 곳곳에서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 열린다.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리는 추도식도 이 중 하나로, 1974년부터 열리고 있다.
일본 시민들은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추도식을 이어왔다.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첫 당선 이듬해인 2017년부터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고이케 지사는 2017년부터 역대 도지사들이 보내던 조선인 희생자 추도문을 보내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간토대지진 때 숨진) 모든 희생자를 한꺼번에 추도한다”는 핑계를 댔다. 학살로 희생당한 이와 자연재해인 지진으로 숨진 이는 피해의 성격이 다르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본 우익들도 2017년부터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도식 장소 몇십 미터 옆에서 ‘방해 행사’를 열고 있다.
일본 사회 우경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야기도 소개하고 싶다. 고이케 지사가 추도문 송부를 거부한 2017년부터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 참가자 수는 오히려 늘고 있다. 2017년 참가자 수는 2016년보다 1.5배가량 많은 500여명이었다. 지난해에는 700여명으로 증가했다. 도쿄도가 최근에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 주최 쪽에 일종의 준법 서약서를 내지 않으면 행사 허가를 내줄 수 없다며 추도식 주최 쪽을 압박하자, 일본 시민 3만명 이상이 항의문에 서명했다.
일본에 사는 동안 일본 사회 우경화에 대항하는 이런 일본 시민들의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2017년 여름 수도권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평화공원에서 우익들이 ‘헤이트 스피치’ (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를 하자, 일본 시민들이 공원 전체를 둘러싸고 ‘카운터’(반대) 집회를 열었다. 우익들은 몇 미터 채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지난해에는 일본 아이치에서 열린 국제 미술제인 ‘아이치트리엔날레’에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됐다. 우익들의 협박 전화 등으로 개막 사흘 만에 소녀상 전시가 중단됐지만, 시민들의 항의와 전시 기획자들의 노력으로 폐막 일주일 전 극적으로 전시가 재개됐다. 일본 시민운동은 한국과 비교하면 화려하지 않다. 한국 촛불집회처럼 수십만이 참가하는 집회는 사라진 지 오래다. 집회도 참가자 발언을 듣는 형태 위주로 차분하게 진행된다. 한국과 비교하면 구호도 격렬하게 외치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꾸준하게 노력하는 측면에서는 놀라운 경우가 많다. 일본 지역별로 조선인 강제동원 및 위안부 피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조선인 군인·군속 유골 반환 같은 문제에 대해서 수십년씩 연구를 하고 운동을 한 이들이 있다. 한국 정부가 작성했던 강제동원 피해 관련 진상조사 보고서 곳곳에도 이런 조용한 일본인 활동가들 도움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일본 시민 활동가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일본 내 취재는 불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garden@hani.co.kr
※조기원 <한겨레> 도쿄 특파원이 지난 6월22일 귀국했습니다. 김소연 신임 도쿄 특파원은 일본의 입국 제한 조처가 완화되는 대로 현지에 부임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