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현 ㅣ 작가
아버지와 대면하지 못한 지 몇달째다. 아버지는 지금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치매가 시작되고 벌어지는 사고 위험이 관리되길 바라는 입원이었다. “아버지 오늘 뭐 했어요?” “그냥 있었지.” 요양병원 안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아버지와 만나면 매번 같은 대화가 반복된다. 코로나 이전에는 같이 산책하면서 옛 기억을 더듬거리며 대화 소재라도 찾았다. 하지만 이제 면회가 금지됐다. 최근 점심때 30분 정도 외출이 가능하게 바꾸었지만, 집단감염을 피하고자 최대한 대면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갇혔다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국민건강보험공단 2018년 자료에 따르면, 65살 이상 사망자 중 요양병원과 요양원 평균 재원 기간이 각각 460일과 904일이다. 생애 마지막 평균 707일 정도 요양기관에 떠맡겨지는 셈이다. 나도 처음부터 떠맡기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면회를 자주 갔었다. 내가 병원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라고 느꼈다. 하지만 가서 막상 할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아버지 면회나 의사 면담 정도였다. 어느새 나도 띄엄띄엄 가게 됐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도 가끔 아버지를 회고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요양병원은 내 삶을 쥐고 흔들던 치매 곁의 경험을 삭제시킨다. 환자가 죽기 전까지 찾지 않는 보호자가 될 것만 같아 불길했다.
아버지가 병원 밖에서 살아갈 수 없을까? 정부는 작년부터 ‘커뮤니티 케어’의 선도사업을 시행 중이다. 어서 장애인과 노인에 대한 치료, 돌봄, 관계망 지원이 탄탄해져서 아래서부터 보장된 권리가 분수처럼 아버지같이 노인도, 중증도 아닌 사람에게까지 닿기를 바랐다. 하지만 여전히 꿈이다. 아직 아버지의 삶과 나의 삶은 양립할 수 없다. 가정 내 독박 돌봄을 떠안거나, 요양기관에 떠맡기거나, 극단적인 선택지뿐이다.
이제까지 요양기관은 늙음을 격리하고 죽음을 처리하는 닫힌 공간이었다. 코로나 이후 코호트 격리가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이러면 안 된다. 요즘 세상에 가장 쓸모없게 느껴지는 당위와 윤리의 말이다. 안전을 위해 존엄을 미뤄두는 것만이 답이 아니듯, 나 또한 더 나은 지역 돌봄 정책이 나올 때까지 아버지의 존엄을 미뤄둘 수만 없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부모를 잘 모신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 모두의 존엄을 위해 고민해야 한다. 동료 시민으로 돌봄과 요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학교가 방역과 교육을 어떻게 병행할지 고민하듯, 요양기관도 방역과 요양을 어떻게 병행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열린 요양, 참여적인 요양이 필요하다. 요양기관은 이미 죽어버린 예외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삶이 이어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요양’은 불가능할까? 당사자, 보호자, 의사, 간호사, 요양보호사, 간병인, 영양사, 사회복지사, 지역 주민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 요양 공간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 우선 코로나 시기 안전한 면회 방법을 함께 논의해볼 수 있다. 면회 지침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심리 지원, 회진 시간, 주간 문화행사, 불편사항 등도 논의해볼 수 있는 주제다. 서울요양원은 올 총선 때 투표를 원하는 입소자 20명을 위해 거소투표를 진행했다. 이를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는데, 이럴 때 보호자가 힘을 보탤 수도 있다.
우리는 돈벌이 수단이 된 요양기관의 비리와 횡령, 노인 학대, 열악한 노동 환경 등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히 많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많은 안 될 이유와 견줘 돼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를 합의해야 한다. 바로 존엄이다. 요양병원에서 보호자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았으면 좋겠다. 요양에도 참여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