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국내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코로나19 이후 기업 75%가 유연근무제를 새로 도입하거나 확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절반 이상은 유연근무제가 생산성 향상에 긍정적이고, 코로나 진정 이후에도 유연근무제를 유지·확대하겠다고 답했다. 유연근무제 중에선 재택·원격근무가 가장 많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는 지난 5월 “앞으로 10년에 걸쳐 재택근무를 중심으로 회사의 운영 방식을 재조정해 전직원의 50%가 재택·원격근무를 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직원 5000여명의 캐나다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쇼피파이는 내년까지 사무실을 폐쇄하고 이후에도 직원 대부분이 영구적으로 원격근무를 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재택근무가 새로운 표준(뉴노멀)이 됨에 따라 집 안 일부를 업무공간으로 꾸미는 홈오피스 인테리어 수요도 생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택연금 시절 아침 9시면 양복을 입고 안방에서 거실로 출근했다는 일화도 주목받고 있다. 재택근무는 소모적인 출퇴근 비용과 사무실에서의 비효율적인 시간을 없애 효율성을 높인 근무체계로 조명되고 있지만 ‘효율성 위주의 업무 방식’은 뜻하지 않은 문제점도 드러내고 있다.
직장의 ‘업무 외 역할’이 사라지면서 드러난 재택근무의 한계다. 동료들과 비업무적인 소통과 관계, 휴식과 딴짓하기 등이다. 오픈소스 기반의 온라인 협업도구 개발 기업인 깃랩(GitLab)은 재택근무 기업인데, 업무 중 잡담을 장려한다. 이 기업에서 잡담은 구성원들의 ‘의무’다. 원격업무 선도 기업 아이비엠(IBM)은 2009년만 해도 전직원의 40%가 재택·원격근무로 일했지만 2017년부터 사무실 출근으로 선회했다. 협업과 소통의 가치 때문이다. 2014년 야후도 재택근무를 금지하며 “복도와 구내식당에서의 토론이 최선의 깨달음을 준다”고 밝혔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직무가 원격근무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출근해서 오래 머무르고 싶은 사무 환경을 위해 애쓴다. 스티브 잡스는 사옥을 지을 때 화장실이나 식당을 오가는 직원들의 동선을 길게 만들어 의도하지 않은 만남이 불가피하도록 설계했다. 우연한 만남에서 창의성이 피어난다고 믿은 까닭이다. 가시적인 성과와 효율성 위주로 도입된 재택근무 확대는 비생산적인 활동과 우연한 만남의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구본권 산업팀 선임기자 starry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