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이란 이름이 상징하듯, 2020년의 한국에서 1930년대의 미국을 읽는 건 나름 의미가 있다. 중요한 건 뉴딜이 미국민에게 사회안전망을 제공함으로써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텄듯이, 한국판 뉴딜도 ‘잊힌 사람들’에게 안전망과 권리를 제공해서 사회를 재설계하는 일이다.
지난 14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추진 계획을 브리핑하고 있다. 청와대 블로그 자료사진
박찬수 ㅣ 선임논설위원
박원순 사건과 부동산에 묻혀버렸지만, 지난주 정부가 대통령 주재로 국민보고대회까지 열어 ‘한국판 뉴딜’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디지털·그린 경제를 목표로 5년간 160조원을 투자하고 19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은 야심차긴 하나 그리 감동적이진 않다. 과거 김영삼 정부가 내세운 ‘신경제 100일’부터 가까이는 이명박 정부의 ‘747 프로젝트’까지 역대 정부는 예외 없이 성장 담론을 제시했지만, 목표에 걸맞은 성과를 거뒀다고 기억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한국판 뉴딜’을 봐도, 19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긴다는데 이게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생긴다는 건지, 디지털·그린 경제 전환으로 줄어드는 일자리도 분명 있을 텐데 그런 걸 다 고려한 수치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재정 투입에 따른 산술적인 일자리 증가분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거창한 ‘목표치’만으로 국민에게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한국판 뉴딜’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이 불평등과 격차 해소를 위해 우리 사회의 방향을 새롭게 모색할 시점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뉴딜’이란 이름이 상징하듯, 2020년의 한국에서 1930년대의 미국을 읽는 건 나름 의미가 있다.
대공황이란 미증유의 재난에 처했던 미국처럼, 지금 우리도 코로나라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정부 역할을 강화해서 실직과 생존의 벼랑에 몰린 수많은 국민을 구해야 하는 사명도 비슷하다. 루스벨트 정부가 노동집약적 산업 대신에 자본집약적이고 국제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지원했듯이, 디지털·그린 뉴딜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에 눈을 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정치·사회 환경도 흡사한 부분이 있다. 1932년 미국 민주당은 대통령과 상·하원 선거에서 압승하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입법으로 뒷받침할 튼튼한 기반을 마련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이라는 인상적인 승리를 거둔 건, 1930~40년대 미국 리버럴의 약진을 떠올리게 한다.
더욱 중요한 건, 뉴딜이 미국민에게 사회안전망을 제공함으로써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텄듯이 한국판 뉴딜도 ‘잊힌 사람들’(forgotten people)에게 안전망과 권리를 제공해서 사회를 재설계하는 일이다. 대기업 임금노동자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국민이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요즘의 상황은, 사회안전망을 훨씬 폭넓게 구축하는 게 매우 시급한 과제임을 일깨웠다.
정부가 ‘전국민 고용보험’을 선언했지만, 우선 특수고용직 노동자부터 시작해 자영업자까지 모든 국민에게 실업의 안전판을 제공하는 데 시간을 끌지 말아야 한다. ‘뉴딜 이전에 미국민에게 가장 가까운 연방 정부기관은 우체국이었다. 뉴딜 이후엔 노인연금, 실업급여, 최저임금을 다루는 다양한 연방기관이 미국민과 가까워졌다’는 말처럼, 다양한 복지 관련 정부기관들이 국민에게 친숙하게 다가서야 한다.
특히 직종에 따라서 또 같은 직종에서도 일하는 형태에 따라 비정규직으로, 자영업자로, 때론 사업자로 분류되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에게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게 절실하다. 통계마다 조금 다르지만 특고 노동자는 200만명을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숫자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게 분명하다.
한 예로, 코로나 사태로 ‘언택트’(untact)가 일반화하면서 택배회사들의 매출은 크게 늘었지만 택배 노동자들의 처지는 오히려 열악해졌다. 택배회사에 맞설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뉴딜의 가장 중요한 입법으로 와그너법(노동관계법)이 꼽히듯이, 특고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노동3권을 보장하는 건 ‘한국판 뉴딜’의 핵심 과제가 되어야 한다. 물론, 재계와 야당의 반대가 거셀 게 분명하다. ‘한국판 뉴딜’이 성장 담론을 넘어서는 담대한 사회개혁 프로젝트가 되려면, 그런 어려움은 과감하게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정부는 가져야 한다.
대공황의 수렁에 빠진 미국 경제를 되살린 게 뉴딜인지 아니면 2차 세계대전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경제적 평가와 별개로, 루스벨트 시대를 거치며 미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편된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뉴딜의 진정한 업적이다. 뉴딜(New Deal)은 말 그대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대응’을 국민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90년 전의 ‘뉴딜’을 굳이 2020년 한국에 다시 불러낸 건, 내용은 달라도 변화의 지향과 가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리란 믿음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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