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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메르켈이 트럼프 ‘갑질’에 맞서는 법 / 박민희

등록 2020-07-23 14:04수정 2020-07-24 02:40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8년 6월9일 캐나다 샤를부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도중 탁자를 손으로 짚은 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얘기하고 있다. 샤를부아/로이터 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8년 6월9일 캐나다 샤를부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도중 탁자를 손으로 짚은 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얘기하고 있다. 샤를부아/로이터 연합뉴스

박민희 논설위원

“미군의 독일 주둔은 독일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유럽 회원국들뿐 아니라 미국의 이익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6월26일 유럽 언론사들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6월24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독일 정부와 어떤 사전 협의도 없이 주독미군 3만4500명 가운데 9500명을 감축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데 대한, 메르켈 총리의 정곡을 짚는 응답이다. 주독미군은 미국의 러시아 견제, 중동·아프리카 전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트럼프 식으로 막무가내로 감축하면 미국의 세계전략도 타격을 입게 된다.

메르켈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미국이 세계적 강대국으로 행동하고자 한다는 관념 속에서 성장했다. 이제 미국이 스스로 그 역할에서 물러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현상에 대해 깊게 성찰해야 한다.”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스스로 포기하는 새로운 현실을 직시하라는 충고다. 메르켈은 시종일관 이 원칙을 지키며 대응책을 마련해 왔다.

2016년 취임 직후부터 트럼프 대통령은 집요하게 메르켈 총리를 비판하고 공격했다. 그 핵심에는 독일이 미국의 요구 만큼 방위비를 내지 않는다는 트럼프의 불만이 있다. 그는 독일을 비롯한 나토 회원국들이 국내총생산(GDP)의 2%를 국방비로 지출하는 의무를 지키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다가 결국 주독미군 감축을 발표했다.

메르켈과 독일 정부는 자국의 국익과 원칙에 입각해, 트럼프의 ‘갑질’에 단호하게 대응해왔다. 트럼프가 이란 핵합의와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하자, 독일 정부는 유엔 안보리 등에서 이를 강하게 비판하고 기존 합의를 지키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독일이 러시아산 가스를 도입하기 위해 건설한 ‘노르드 스트림’ 가스관에 대해서도 미국은 집요하게 방해하고 있다. 독일과 러시아는 현재 노르드 스트림2 가스관 공사의 막바지 단계에 와 있는데, 미국은 완공을 막기 위해 건설에 참여하는 회사들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미국은 이 가스관이 러시아의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하지만, 독일은 미국이 남아도는 자국 셰일가스를 비싸게 유럽에 팔기 위해 개입하는 것으로 본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1일 의회 연설에서 “미국의 제재는 우리의 국제법 해석에 맞지 않다. 제재로 공사 과정이 힘들어지더라도 완공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미국은 전세계 ‘반중국 동맹’을 구축하려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 기업 화웨이의 5세대(5G)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말라고 여러 나라를 압박해 왔다. 미국·오스트레일리아·영국이 ‘반 화웨이 동맹’으로 뭉쳤지만, 독일은 이런 움직임과 선을 긋고 있다. 올해로 취임 15년째인 메르켈은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계속 강화해 왔으며, 메르켈 취임 뒤 독일의 중국에 대한 수출은 5배 이상 증가했다. 메르켈은 총리로서 중국을 12차례나 방문했다.

한국의 외교·안보 고민은 상당 부분 독일과 겹치지만, 더욱 복잡하고 어렵다. 독일은 통일을 실현해 ‘구 냉전’의 부담은 덜고 ‘신 냉전’ 대비에 전념할 수 있지만, 한국은 정전체제와 북한 핵문제라는 구냉전의 유산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신냉전의 파고까지 맞이하고 있다. 미-중 신냉전으로 전세계 질서가 요동치는 가운데 미국은 한국에 중국 봉쇄망 동참을 압박한다. 중국 역시 미국 편에 서서 자국의 핵심 이익을 침해하는 국가에는 보복하겠다고 벼른다. 대선을 앞둔 트럼프가 반중 행보로 지지층을 결집하려고 휴스턴의 중국영사관 패쇄라는 초강수까지 동원하면서 미-중 긴장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외교는 미-중 ‘어느 편이냐’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우리의 외교·안보 원칙을 일관되게 추진해나가려는 전략과 의지가 더욱 절실하다.

미국의 주독미군 감축 발표 이후 트럼프의 다음 표적은 주한미군이라는 전망도 계속 나온다. 트럼프가 대선 전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을 받아내기 위해 주한미군 감축 카드를 꺼내 압박에 나선다고 해도, 우리 정부는 차분히 대응하면서 전작권 환수와 우리 군의 대비 태세를 더욱 철저히 하면 된다. “주한미군은 한국 안보뿐 아니라 미국의 이익도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한국이 미국 뜻과 다르게 행동하면 큰 일 난다는 보수언론의 선동은 한국 외교의 중요한 걸림돌이다. 미국의 발표 뒤, 독일 언론에선 ‘안보 위기론’ 호들갑이 없었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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