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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루스벨트는 왜 ‘계급의 배신자’ 소리를 들었나

등록 2020-08-11 04:59수정 2020-08-11 15:06

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03
1935년 백악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실업수당과 노인연금을 담은 역사적인 사회보장법에 서명하고 있다. 미 의회도서관 소장
1935년 백악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실업수당과 노인연금을 담은 역사적인 사회보장법에 서명하고 있다. 미 의회도서관 소장

1932년 미국 대선은 ‘리버럴 대 리버럴의 대결’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허버트 후버 모두 자신이 ‘리버럴’임을 강조했다. 루스벨트는 ‘새로운 리버럴리즘’(new liberalism)을 주창했고, 후버는 ‘진정한 리버럴리즘’(true liberalism)을 내세웠다. 루스벨트 이후 19세기 자유주의자(liberal)는 보수주의자(conservative)가 됐다. 리버럴은 ‘진보’라는 새로운 함의를 획득했다.

박찬수 ㅣ 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사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2017년)를 펴냈다. pcs@hani.co.kr

“지난날 정부의 정치철학에서 잊혀진 이 나라의 남성과 여성들은 우리에게 보호자가 되어달라고, 국부를 재분배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대도시에서, 중소도시와 마을에서, 수백만의 시민은 그들의 삶과 생각을 규정하는 낡은 기준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으리란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민을 위해 ‘새로운 대응’(a new deal)에 나설 것임을 여러분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약속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거 캠페인이 아닙니다. 단지 표를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활한 미국을 국민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나는 여러분의 지지를 호소합니다.”

1932년 7월 시카고의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후보 수락연설에서 ‘뉴딜’(new deal)을 처음 언급했다. ‘미국민을 위해 뉴딜에 나설 것을 약속한다’, 딱 한마디였다. 이제는 고유명사가 된 ‘뉴딜’(New Deal)은 처음엔 그렇게 하나의 보통명사(a new deal)로 시작됐다. 후보 수락연설에 뉴딜의 청사진이나 구체적 실행계획을 담지 않은 건, 아직 체계적으로 준비된 정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국가 운영에 관한 거대한 인식의 전환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사빈 포레로 멘도자 교수(보르도대)는 루스벨트 평전에서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심어준 이 실험, 뉴딜은 하나의 정치적 주장이요 입장이었을 뿐 결코 사전 연구를 거친 하나의 확고한 계획이 아니었다. 워싱턴에 도착한 대통령에게는 그 어떤 분명한 계획도 없었다. 뉴딜이 사전에 기획된 어떤 독트린에 상응한다는 생각은 웃기는 얘기다. 그 원칙은 다만 공동체의 모든 정치권력을 한가지 목표, 국민의 삶을 보다 나아지게 만드는 목표에 집중한 것이었다”고 평했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정당이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책무를 수행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당시의 민주당만큼 준비가 덜 된 정당도 없었다”고 말했다.(<절반의 인민주권>, 2008년)

그럼에도 뉴딜이 정부 역할을 재정립하고 사회를 새롭게 디자인한 현대 정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평가받는 건, 루스벨트의 실용주의 정치력에 힘입은 바 컸다. 1932년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루스벨트는 기존 입장 중 여러 부분을 수정하고 때론 뒤집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와의 단절과 담대한 정책을 말하면서도 유연함을 잃지 않을 것임을 항상 강조했다. 한 기자가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사회주의자입니까, 아니면 자본주의자입니까?”라고 묻자, 루스벨트는 “나는 기독교인이고 민주당원입니다. 그뿐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1932년 대선에서 허버트 후버 공화당 정권에 불만을 품은 다양한 집단을 모두 끌어안으려 애썼다. 뉴딜 정책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때론 모순적이란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관점과 통찰력, 강력한 추진력이 루스벨트를 4선에 성공한 훌륭한 대통령 반열에 오르게 했다.

주식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루스벨트는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압승했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루스벨트 승리를 낙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는 일찌감치 공화당 후보직을 예약했지만 루스벨트는 4차까지 가는 경선 끝에 간신히 민주당 후보가 됐다. 더구나 대도시에서 득표력이 있던 경쟁자(앨 스미스)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몇달 동안 루스벨트 지지를 유보했다. 경제 상황이 좀 호전되면 후버 대통령이 재선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전망이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우세했다. 후버는 루스벨트를 과소평가했다. 루스벨트가 민주당 후보가 되자 후버 대통령은 쾌재를 부르며 몇달간 지역 유세를 하지 않고 백악관에서 일상 업무에만 힘을 쏟았다.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연 1932년 미국 대선은 ‘리버럴 대 리버럴의 대결’이었다. 후버와 루스벨트 모두 자신이 ‘리버럴’임을 강조했다. 루스벨트는 ‘새로운 리버럴리즘’(new liberalism)을 주창했고, 후버는 ‘진정한 리버럴리즘’(true liberalism)을 내세웠다. 두 사람은 ‘리버럴’의 구호를 공유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1920년대 초엔 ‘후버 대통령-루스벨트 부통령’ 카드가 워싱턴 정가에 떠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1929년 세계 대공황과 이에 대한 대처 방식의 차이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두 사람이 주창한 ‘리버럴’의 내용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간극이 벌어졌다.

후버는 자수성가한 정치인이었다. 어렸을 적 부모를 여의고 숙부가 운영하는 업체 일을 봐주며 자라나 광산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재난 속에서도 정부가 국민을 직접 지원하는 데 반대했다. 정부는 기업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 고용을 늘리도록 해야 하며, 섣부른 지원은 사람들의 자립심을 갉아먹는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농민·흑인·이민자·여성에게 손을 내민 루스벨트는 뉴욕 대지주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철도회사 부사장이었다. 여름 휴가는 메인주 부근의 작은 섬에서 보냈고 열네살 때 요트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가족이 여행할 때엔 호화롭게 치장된 전용 객차를 배정받았다. 그래서 루스벨트를 다룬 책 중엔 <계급의 배신자>(Traitor to his Class)란 제목의 전기도 있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출신의 루스벨트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편 건, 소아마비로 인한 고통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정치학자들은 추정한다. 39살 때 갑자기 발병한 소아마비로 그는 두번 다시 걸을 수 없으리라 좌절했고, 성공적인 재활 치료를 끝낸 뒤에도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제대로 걷거나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그의 병(소아마비)은 그를 고통받는 국민과 같은 처지로 만들었다. … 이 호된 시련이 루스벨트에게 정신적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다른 사람들을 좀더 생각하는 깊고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그의 친구와 친척들은 말했다.”(<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사빈 포레로 멘도자)

뉴딜은 현대 정치사에서 ‘리버럴’(liberal)의 의미를 재정립했다. 그 전까지 ‘리버럴’은 정치적 자유를 최대한 확대하는 것, 정부에 대항해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것, 기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뜻했다. 정부와 정당은 작을수록 좋았고, 정부가 커지면 관료주의만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후버가 말한 ‘진정한 리버럴리즘’이었다.

뉴딜 이전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그 점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정치노선 차이 없이 단지 지역기반이 다른 게 두 정당의 기본 구조였다. 공화당은 북부 공업지대를, 민주당은 남부를 기반으로 했다. ‘북부 대 남부’라는 지역 대결구도에선 공화당이 훨씬 유리했다. 인구 많은 북부에 기반한 공화당은 수십년간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했다. 민주당은 전국적 승리를 포기한 채 ‘만년 야당’에 만족했다. 루스벨트가 이런 구도를 완전히 뒤바꿔버리기 전까지, 민주당이 다수파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뉴딜은 미국 정치의 갈등 구조를 바꿨다. 뉴딜은 국가의 힘을 이용해 자본주의로 피폐해진 다수 국민의 삶을 보호하려 시도했다. ‘북부 대 남부’라는 지역 갈등을 전국적 차원의 경제·사회 갈등으로 대체했다. 1932년과 36년 선거에서 루스벨트가 잇따라 승리하면서 공화당의 ‘지역 우위 체제’는 붕괴하고 민주당 주도의 뉴딜 정당체제가 새롭게 탄생했다. “이 시기 민주당이 내세운 정강·정책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고 공화당의 정강·정책과도 뚜렷이 구분됐다. 국가의 시장개입과 정부 역할, 농업정책, 노동정책, 기업 규제, 사회복지 및 외교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의 정책은 진보적인 방향으로 크게 변화했다. 그 결과 비남부 지역에서 민주당은 부활했다. 민주당이 뉴딜 이슈로 낡은 지역주의 갈등을 대체하는 데 성공하며, ‘뉴딜 갈등’이 전국화한 것이다.”(‘정당과 유권자: 샷슈나이더 이론의 재조명’, 백창재 서울대·정하용 경희대 교수, 2016)

루스벨트 이후 19세기 자유주의자(liberal)는 보수주의자(conservative)가 됐다. 리버럴은 ‘진보’라는 새로운 함의를 획득했다. 미국 민주당도 ‘자유주의 정당’에서 ‘진보 개혁정당’으로 탈바꿈하며 반세기 가까운 민주당 시대를 열었다.

※ 다음 회엔 ‘루스벨트 뉴딜과 민주당 시대’ 두번째 이야기, 뉴딜은 어떻게 미국 사회를 바꿨나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박찬수
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사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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