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했던 이들은 조선노동당과 비슷한 당 이름을 정한 게 국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런 우려를 깨고 민주노동당이 대중의 가슴속에 성공적으로 자리잡는 데는 4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의당은 어떤 진보를 국민에게 보여줄까,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온라인으로 진행된 정의당의 제9차 당대회에서 여영국 의장(가운데)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왼쪽부터 김희서 부의장, 여영국 의장, 김혜련 부의장. 정의당 제공
정의당이 일요일인 지난달 30일 당대회를 열어 혁신안을 의결했다는 소식은 전날(29일) 더불어민주당이 이낙연 의원을 새 대표로 선출했다는 기사에 묻혀 신문과 방송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6석의 작은 정당 당대회가 176석을 가진 집권당 대표 선출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로에 선 진보정당의 앞날을 결정짓는 당대회 모습으론 초라했다.
정의당이 더불어민주당에만 밀리는 건 아니다. 3개월 가까운 활동 끝에 혁신안 초안을 공개한 바로 그날(8월13일), 미래통합당도 비상대책위원회가 마련한 쇄신안을 발표했다. 두 정당 모두 4월 총선 패배로 노선과 정책의 근본적 재정립을 요구받는 상황이었다. 정의당 혁신안은 3명인 부대표를 5명으로 늘리는 등 지도체제 개편에 무게를 뒀다. 미래통합당의 쇄신안은 기본소득 도입과 복지 사각지대 해소, 국회의원 4연임 금지 등의 내용을 담았다.
20년 전 민주노동당 창립을 주도했던 원로 인사는 “발표 내용만 보면 정의당보다 미래통합당이 더 진보정당 같았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민주노동당을 창당할 때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이었다. 이번엔 미래통합당이 ‘일하는 사람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말하더라. 그렇다면 정의당은 뭘 갖고서 진보정당을 표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정의당이 4월 총선에서 얻은 득표율은 9.67%, 의석은 6석이다. 외형적으론 4년 전인 20대 총선보다 못하지 않다. 하지만 2004년 17대 총선에서 10석의 의석과 13%를 넘는 정당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에 비하면, 20년 가까이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횡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적 영향력으로 보면, 2004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해졌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지금의 어려움보다 미래의 꿈이 희미해진 게 정의당엔 훨씬 아프게 다가온다. 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조문을 둘러싼 논란 등으로 전체 당원의 4분의 1에 가까운 6천여명이 줄었다고 한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 위에 정치세력화했던 진보 진영이 ‘젠더’와 ‘공정’이라는 새로운 의제 앞에서 혼란스러운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기반한 활동이 ‘낡은 진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진보의 층위는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이걸 하나로 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새로운 진보’를 손쉽게 얘기하지만, 그 새로움이 당 강령의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와 어떻게 조율될 수 있는지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왜 필요한지에 정의당은 답을 해야 한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미국의 리버럴처럼 상당한 수준의 ‘진보성’을 흡수한 상황에도, 정의당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를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부대표 수를 늘리고 단일 지도체제를 집단 지도체제로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진보정당이 한국 사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헤아리기 어렵다. 더불어민주당이 보이는 진보성뿐 아니라 강경보수였던 미래통합당이 ‘복지’와 ‘정의’를 정강정책에 담는 상황까지 이른 데엔 진보정당의 역할이 컸다. 국회 담을 허물고 ‘의원님’들의 전유물이던 의사당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도, 권력을 국민 품에 돌려주자는 진보정당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이 좀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건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제 정의당은 차기 당대표를 뽑기 위한 전당대회 체제로 들어간다. 대표 선출 과정에서 진보정당의 꿈과 비전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토론해서 국민에게 제시하길 바란다. 당 강령과 실제 모습에서 비치는 거리감을 뛰어넘어, 사회민주주의든 페미니즘이든 또는 제3의 노선이든 명실상부한 진보정당만의 색깔을 명확하게 드러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2000년 1월30일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진보’라는 말 자체를 꺼리던 시절에 탄생한 첫 대중적 진보정당이었다. 그때 창당 준비에 참여했던 이들은 조선노동당과 비슷한 ‘민주노동당’으로 당 이름을 정한 게 국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런 우려를 깨고 민주노동당이 대중의 가슴속에 성공적으로 자리잡는 데는 4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의당은 어떤 진보를 국민에게 보여줄까,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박찬수 ㅣ 선임논설위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