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을 모아놓은 책 갈무리.
<부산행> <반도>로 유명한 연상호 감독은 영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다. <돼지의 왕> <사이비> <서울역> 등 그의 애니메이션은 빼놓지 않고 본다. 거악과 싸우는 힘이 약한 악, 사이비 종교를 부여잡고 고된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연상호의 작품은 힘겹고 불편하다.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약자들의 꽉 막힌 현실이 연상호가 그린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어서다.
그가 너무 좋아하고, 영향도 많이 받은 인물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곤 사토시 감독이다.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는 내게 주변에선 월트 디즈니 같은 작품이나 유아용 작품을 만들라고 했다. 세계관이 너무 어둡다고도 했다. 곤 감독이 없었다면 아마 흔들렸을 거다.”(2017년 <한국일보> 인터뷰 중에서) 연상호의 인터뷰엔 곤 사토시가 자주 나온다. 아쉽지만 두 사람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곤 감독이 2010년 8월24일 47살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올해 딱 10주기가 됐는데, 일본에선 300쪽 분량의 잡지 한권을 곤의 이야기로 채운 곳도 있다.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 <파프리카> 등 현실과 비현실, 트라우마, 기억, 환상, 꿈을 넘나드는 곤의 작품에선 늘 인간의 불안이 보인다. 애니메이션으로 연결된 두 사람을 볼 때마다 흐뭇하다. 이들에겐 한국과 일본이라는 ‘허들’이 낮다. 그저 우리가 풀어야 할 세상의 어려운 문제를 고민하고 작품에 녹여낼 뿐이다.
새삼스럽게 한국과 일본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최근 일본의 변화 때문이다. 7년8개월 장기 집권을 하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그만두고 새로운 총리를 뽑는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다. 수교 이래 최악의 한-일 관계를 만든 당사자가 뒤로 물러나는 만큼, 뭔가 분위기 전환은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지만 헛된 희망이 될 것 같다. 당선이 유력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대놓고 “아베 총리를 계승하겠다”며 한-일 관계에선 조금도 양보할 뜻이 없음을 못 박았다.
또다시 깊은 수렁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어찌 보면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이래 한-일 관계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해 10월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일본 국민들 중에서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다”는 응답이 26.7%로 이 질문을 시작한 1978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라고 한다. 자칫 두 나라가 제어장치 없이 막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이사 갈 수 없는 이웃, 경제 의존도가 높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협조해야 하는 나라, 서로에 대해 관심이 많아 자주 왕래하고 문화를 즐기며 저출산·고령화, 환경 문제 등으로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적대적일수록 서로 좋을 게 없다. 오히려 위험하다. 한-일 관계 특성상 짧은 시일 안에 획기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긴 힘들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과 일본이 내셔널리즘이라는 ‘허들’을 낮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자는 ‘한국의 국익’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는 것을 일본 사회는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도 ‘닥치고 반일’ ‘죽창가’ ‘토착왜구’ ‘이번 선거는 한일전’ 등 한-일 관계를 악용하는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허들’이 낮아졌을 때 연상호와 곤 사토시가 보려 했던 불평등, 빈곤, 차별, 폭력, 불안, 환경 파괴 등 우리가 진짜 싸워야 할 것들과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김소연 l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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