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수식하는 말은 ‘노토리어스 아르비지’(Notorious RBG)였다. 그 ‘악명’을 기리고자 한다. 긴즈버그의 10년 전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이정연 ㅣ 소통젠더데스크
화창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코로나19 감염병의 위협은 잠시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맑은 아침 녘 가을 하늘을 보자 싱긋 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무심코 티브이를 틀었다가 들려온 뉴스에 곧 뒷걸음질을 쳤다. ‘노토리어스 아르비지’(Notorious RBG), 18일(현지시각) 그가 세상을 떠났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그가 몇번째 여성 대법관인지,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를 수식하는 ‘악명 높은’(notorious)이라는 단어에 담긴 뜻을 기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의 ‘악명’을 기리고자 한다.
먼저 오해를 거두자. ‘노토리어스 아르비지’라는 별명은 긴즈버그 대법관을 공격하는 쪽이 아닌 그를 응원하는 젊은 팬들이 붙여준 거다. 미국 동부 힙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래퍼 ‘더 노토리어스 비아이지’(The Notorious B.I.G.)에서 따왔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법률가로서 성차별과 인종차별 등에 반대하며 싸워온, 기득권과의 투쟁을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이어온 것에 대한 헌사였다. 노토리어스 아르비지는 하나의 팬덤 현상으로 이어졌다. 그의 팬들은 선물 공세를 하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었다.
다시 그의 ‘악명’으로 돌아가보자. 젊은 팬들이 있기 전 그는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악명’ 높았다. 1960~70년대 변호사로 일하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받는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는 긴즈버그를 향해 가부장제와 성차별 구조를 공고히 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쪽에서는 ‘마녀’ ‘소송사냥꾼’ ‘악랄한 운동가’로 불렀다. 대법관이 된 뒤 다소 신중한 태도로 ‘중도 노선’을 걷는 것으로 비친 긴즈버그에게 ‘꽉 막힌 잔소리꾼’ ‘꼰대’ ‘뜨뜻미지근한 급진주의자’라는 악명이 더해졌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악명’은 어느 쪽이든 한쪽 ‘편’에 선 사람들이 부여한 것이었다.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을 향한 비난, 경멸이라는 ‘언어적 공격’이었다. 어느 한쪽 편에 선 사람들은 긴즈버그 대법관이 온갖 차별과의 싸움에 지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아갔던 역사를 애써 가리고 지운다. 그런데도 그가 인권과 자유, 평등의 신장에 남긴 발자국은 너무 깊어서, 같은 길을 뒤쫓는 사람들은 그 깊은 발자국을 모른 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긴즈버그는 그 악명에 굴하지 않았지만, 악명을 얻게 되는 건 달갑지 않은 경험이다. 젠더데스크로 일하며 악명을 얻게 되었다. ‘한겨레 꼴페미의 선봉에 젠더데스크가 있다’ ‘메갈(리아) 기자들이 판치더니, 젠더데스크가 있어서인가’ 등의 글을 보았다. 한편으로는 ‘젠더데스크씩이나 만든 언론사에서 왜 ○○○는 다루지 않나?’라는 불만도 있다. 비난과 불만 속에서 나는 휘청댈 때도 있다.
긴즈버그 대법관에 비할 바는 전혀 못 된다. 그렇지만, 그의 깊은 족적을 더듬으며 비난과 불만 속에서 휘청대다 다시 방향을 잡는다. 부여된 악명은 중요하지 않다. 성차별을 비롯한 온갖 차별에 대한 싸움을 담담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긴즈버그 대법관처럼. 한겨레가 ‘성 평등’을 위해 나아가는 와중에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일이 많을 거다. 하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소수자와 약자의 입장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거나, 혐오와 차별을 강화하는 데 맞서기를 두려워할 수는 없다.
노토리어스 아르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노토리어스’라는 수식어를 기꺼이 감내하며, 그 악명을 이어갈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악명 높은 긴즈버그 대법관을 이렇게 기억하기로 한다. 기억은 긴 싸움에 녹슬지 않는 무기가 될 테니.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기나긴 투쟁 속에서 우리의 기억은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긴즈버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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