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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계의 창] 바이러스와 사는 법을 배우라고요? 사양합니다 / 슬라보이 지제크

등록 2020-10-04 15:57수정 2020-10-05 02:40

슬라보이 지제크
슬라보이 지제크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비디오게임 <메탈기어 솔리드 4>에서 빅 보스는 죽기 전 이렇게 말한다. “세계를 바꾸려 하지 말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라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게임에서와는 달리, 산불, 가뭄, 빈곤, 바이러스로 우리의 삶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킬 기회라도 잡으려면, 우리는 세계를 급진적으로 바꿔야 한다.

2차대전 이후, 과학자들은 폭격으로 건물이 모두 파괴된 베를린의 빈터에서 식물의 천이(遷移) 과정을 관찰했다. 그전에는 독일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외래종 식물들이 번성했다. 공습 때 투하된 소이탄에서 초고온의 열기가 발산되고, 건물들이 파괴될 때 대량의 벽돌 가루가 방출되면서, 토양이 완전히 변화한 결과였다. 과학자들은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생한다면 이런 이상한 변화가 훨씬 더 큰 규모로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09년 호주 산불이 내뿜은 에너지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1500배에 달한다. 2020년 미국 서부 산불의 파괴력은 수소 폭탄 수백 개의 위력에 해당한다. 우리가 성스럽게 여긴 자연 속에서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자연, 불길한 자연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인류는 단순히 자연을 파괴해 온 것이 아니다. 인류는 새롭고 불길한 자연을 스스로 만들면서, 우리 자신이 설 곳을 스스로 좁혀 왔다. 코로나 위기도 그 한 예다. 이런 지금, 우리에게는 가지 말아야 할 네 가지 막다른 길이 있다.

첫째 막다른 길은, 급한 위기를 해결한다는 핑계로 다른 위기를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코로나 위기를 해결해야 하니 환경 문제는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 이를테면, ‘흑인의 삶은 중요하다’ 운동은 흑인에 대한 공권력 남용에 저항하는 운동이기도 하지만, 경제적 부정의에 저항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코로나 위기는 단순한 감염병 위기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맺고 있는 착취적인 관계에 기인한 위기다.

둘째 막다른 길은, 이 어두운 시기를 헤쳐나갈 해법은 도덕과 윤리라는 생각이다. 권력자들은 언제나 위기들을 윤리적 위기로 포장하기를 좋아한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났을 때, 교황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우리에게 탐욕과 소비의 문화와 싸워야 한다고 훈계했다. 하지만 이런 값싼 도덕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어서,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한 위기를 개인 각자의 윤리적 위기로 둔갑시킨다.

셋째 막다른 길은, 코로나 위기나 지구온난화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므로 이제 이 위기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언론은 우리가 처한 새롭고 불길한 환경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조언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도, 지구온난화도 삶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들은 인간이 자연이나 우리 자신과 상호작용을 맺는 과정에서 나타난 위기다. 전세계가 봉쇄되었던 지난봄에 대기의 질이 얼마나 좋아졌었는지를 생각해보라.

넷째 막다른 길은, 우리가 처한 위기들을 모든 차원에서 분명히 인식한 다음에만, 그 인식에 기반하여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고가 먼저고, 그다음에 행동해야 한다는 태도다. 하지만 사고는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긴 하지만 적들도 한다. 우리의 적들이 여러 위기 사이의 관계를 사고하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폴란드 우파는 성소수자를 코로나에 유비하여 수많은 도시를 “엘지비티(LGBT) 청정 지역”으로 선포하고 있다. 또 코로나를 여러 문화가 섞이면서 생긴 현상으로 보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 정체성을 내세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조율되고 단합된 하나의 거대한 행동이 시작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일단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투쟁들에 온전히 참여한 뒤, 그 투쟁을 다른 투쟁들과 연결시키자. 지구온난화와 투쟁하면서 어산지와 연대하자. 코로나 위기와 투쟁하면서 전지구적 보건의료 체계를 만들어나가자. 인종주의 그리고 성차별주의와 투쟁하면서 경제적인 정의를 이루어나가자.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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