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잘나가던 가발공장 와이에이치(YH)무역이 1979년 폐업하자 직원 200여명이 신민당 마포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야당 당사는 일종의 성소로 여겨졌고, 김영삼 총재는 보호를 약속했다. 하지만 농성 11일 만에 경찰이 무리한 진압에 나서 여성 노동자 1명이 추락사했다. 이 사건은 김영삼 의원 제명과 부마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신민당사는 유신 독재의 종말을 재촉한 상징적 장소로 널리 각인됐다.
정당의 당사는 이렇듯 건물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1980년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일당이 만든 민주정의당 당사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요 타깃이었다. 1984년 11월, 대학생 264명이 민정당사를 점거했다. 진압과 연행으로 끝났지만 ‘노동악법 개정’을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에 민주화 세력이 결집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대선·총선 등 주요 선거의 승패에 따라 정당들은 당사 이전을 반복했다. 국회가 있는 여의도에서 버티고 싶지만 임대료를 감당하는 게 버거웠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1997년 일찌감치 국회 앞 대로변 부지를 사들여 건물을 짓고 ‘자가 당사’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 측근들이 재벌로부터 대선자금을 ‘차떼기’로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아시아 최고를 자부한 초현대식 당사도 팔아치울 수밖에 없었다. 2004년 당사를 매각해 추징금을 갚고 천막당사를 거쳐 염창동, 여의도, 영등포 일대를 전전하며 임대 당사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16년 임대 생활을 끝내고 5일 여의도에 건물을 마련했다. 지난 7월 김종인 비대위가 “새로운 여의도 시대를 맞겠다”며 국회 앞 남중빌딩을 400억원에 사들인 것이다. 2017년 대선과 2018년 지방선거에 잇따라 참패한 뒤 여의도에서 1㎞ 이상 벗어난 영등포 우성빌딩 일부 층을 임대해 2년 동안 당사로 써왔지만, 비대위 출범 이후 추진해 온 정강정책과 당명 변경 등 개혁 작업에 발맞춰 ‘정치의 중심’ 여의도로 당사를 귀환시켜 당을 번듯하게 재건하고 싶다는 김 위원장의 의지가 실린 결정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김 비대위원장은 5일 여의도 당사 현판식에서 “내년 서울시장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다시 정권을 찾아오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대선, 지방선거, 총선에서 잇따라 패배한 국민의힘이 거액을 들여 여의도 당사 매입에 전격적으로 나선 건 어쨋든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때문에 재테크 요인도 당사 매입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열린우리당 시절 영등포 청과물시장 공판장, 당산동 등 임대 당사를 전전하던 더불어민주당이 2017년 2월 여의도 장덕빌딩을 200억원에 매입해 입주했는데, 현재 300억원을 호가하면서 대박이 난 데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역시 김 비대위원장이 2016년 민주당 비대위 대표시절 추진했던 당사 매입 계획을 민주당이 실제 실행에 옮긴 덕으로 알려졌다. 바야흐로 이제 당사도 재테크의 수단이 된 셈이다.
신승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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