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 프랑스어권에서 지낸 경험이 있으나 프랑스어와 관련한 언급을 듣긴 어렵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남성 유력 정치인이 ‘엘리트 특권층’이라고 비판받은 것과 달리, 흑인 여성으로 미국인이라는 정체성까지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윌밍턴/AP 연합뉴스
지난 8월 말 누군가 대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낯선 백인 남성이었다. 민주당 시장 경선 후보였던 그의 핵심 공약 중 하나는 시 공무원의 외국어 실력 향상과 다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태도와 공약은 매우 뜻밖이었다.
선거를 앞둔 미국 정치인들에게 ‘영어 단일언어주의’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영어 단일언어주의란 쉽게 말해 다른 언어를 배제하고 오로지 영어만 쓰는 사람이야말로 ‘정통 미국인’이라고 여기는 인식이다. 그 때문에 정치인들은 비록 다른 언어를 쓸 수 있어도 집 밖에서는 영어만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다른 언어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미국 대선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영어만 쓴다.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마이크 펜스 역시 영어만 쓴다. 이에 비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는 인도 남쪽 주요 언어인 타밀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자메이카인 아버지와 인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타밀어를 모어로 둔 어머니로부터 간단한 인사 표현과 단어 등을 자연스럽게 배웠고, 12세부터 18세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에 살면서 1년 동안 다닌 프랑스어 전용 학교와 일상생활에서 프랑스어를 접했다. 하지만 해리스가 프랑스어를 얼마나 잘하는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2019년 대통령 경선 후보로 출마하기 전 출간한 자서전에서 프랑스어를 잘 몰라 몬트리올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언급한 것 외에 프랑스어와 관련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부통령 후보가 된 뒤에도 프랑스어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2년 당시 재선에 도전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 맞서 공화당은 밋 롬니 매사추세츠 전 주지사를 후보로 지명했다. 모르몬교 신자인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 선교를 위해 프랑스어를 배운 바 있다. 이 점을 파악한 민주당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롬니가 유창하게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영상을 활용해, 그가 서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엘리트’라고 공격했다. 롬니 역시 자신이 프랑스에 한동안 살았다는 것, 자신의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2004년 대선에서 후보의 프랑스어 실력은 이미 논쟁거리였다. 역시 재선을 꿈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에 맞서 민주당은 존 케리 상원의원을 후보로 지명했다. 공교롭게도 케리는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배운 프랑스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공화당은 이런 케리를 향해 서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귀족이라고 공격했다. 케리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훗날 오바마 대통령 재임 시절 두 번째 국무장관이 된 그의 프랑스어 실력은 외교 무대에서 빛을 발했다.
미국 내에서 프랑스어는 ‘엘리트’ 언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후보를 향한 이런 공격은 효과를 발휘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랑스어는 20세기 초까지 거의 300여 년에 걸쳐 유럽의 외교 언어였던 데다 프랑스 문화와 예술이 타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는 귀족의 언어, 즉 상류층이나 엘리트 계급의 언어라는 이미지가 여전히 강하다. 여기에 더해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퍼져 있는 영어 단일언어주의까지 겹쳐 프랑스어, 나아가 다른 외국어를 사용하는 후보에 대해 미국 유권자들은 썩 호의적이지 않다.
2004년의 존 케리, 2012년의 밋 롬니 역시 ‘프랑스어 실력’으로 곤욕을 치렀지만, 2020년 해리스의 경우는 또 다르다. 두 사람은 엘리트라는 비판은 받았지만 상류층 집안의 백인 남성이었던 그들에게 제기된 논란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다문화 가정의 딸로 태어나 자란 해리스가 프랑스어 실력을 드러내는 순간, 또는 타밀어로 인사라도 하는 순간, 그는 자칫하면 미국인으로서 정체성까지 의심받게 될 개연성이 아주 높다. 그러니 해리스로서는 인도, 캐나다 등과 자신의 인연에 대해 밝히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창 선거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해리스를 보면서 나는 미국인들의 영어 단일언어주의가 얼핏 보이는 대로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를 초월해 인종과 성별 문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중이다. 이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가 공개된 장소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모습을 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득 될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파우저 ㅣ 언어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