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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기현의 ‘몫’] 수급자의 권태로운 위기

등록 2020-10-11 15:34수정 2020-10-12 13:47

조기현 ㅣ 작가

“제발, ‘기타 질환’ 진단은 안 될까요?”

나는 또 처량해졌다. 다시는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아버지의 기초생활수급자 의료급여 일수가 초과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의료비 한도가 넘어섰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지낸다. 몇년 뒤에 내 기반이 생길 때 퇴원을 계획하고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번주 안으로 진단서를 받아야 했다. 나는 요양병원 원무과에서 ‘의료급여일수 연장승인 신청서’를 내밀었다.

“이틀 있다가 의사 면담하면서 잘 얘기해보세요.”

늘 사정을 봐줬던 직원도 이번에는 확실히 답하기 애매한 듯했다. 기초생활보장 의료급여는 네 종류다. 그중 아버지는 두 종류를 받고 있다. 하나는 치매, 또 하나는 알코올 의존증이다. 주민센터에서는 이번에도 알코올 의존증 질병 코드(기타 질환에 속함)까지 받아오면 된다고 조언했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에서 지낸 지 2년이 가까웠다. 그만큼 술과 떨어져 지냈고, 지금도 알코올 의존증 진단이 가능한지 판단의 영역이 남았다. 주치의의 재량이 모든 걸 결정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주치의는 지난번 치매로 의료급여 연장 신청서를 부탁했을 때도 마뜩잖아했다. 자신의 진단서 한장이 세금 낭비를 초래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버지가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어림잡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내가 책을 내고 여기저기 방송에서 돌봄 사회화를 외치고 다닐 때도 나에게 “개인적인 일을 보편적인 척 말하지 말라”고 한소리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때마다 찾아오는 수급자 평가나 심의에 내 모든 일상이 걸렸다. 심의를 통해 ‘의료급여 과다 이용’을 잡는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번도 과다한 의료쇼핑을 한 적이 없다. 지금 심의는 내가 성취해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싱크홀이다. 나는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은 땅 위에 글과 활동을 차곡차곡 짓고 있는 꼴이었다. 계속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을까? 글 마감은 지킬 수나 있을까?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의사에게 뭐라고 부탁해야 할까? 부탁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나는 쉽사리 답하지 못할 오만가지 질문에 주저앉아버린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하던 활동은 다시 뒷전으로 밀리고 예전처럼 아버지에게 벌어지는 돌발 사고에 혼자 쩔쩔매며 병원비에 휩쓸릴 것이었다.

이런 위기감은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지독하게 상기시킨다. 위기감에 허둥대면서도, 한편으로 권태롭기까지 하다. 매번 반복되는 위기이기 때문이다. 매번 반복되는 위기를 매번 반복해서 쓰는 내가 참 발전 없는 작가가 될 것 같아 불안하다. 권태로운 위기감에 어쩔 줄 몰라 한주 내내 뜬눈으로 새벽을 보냈다.

근로능력평가를 할 때는 아버지의 남아 있는 기력조차 원망스럽다. 아버지는 평가하는 사람들 앞에서 건강함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자신이 쓸모없다는 낙인이 두려운 탓이다. 그럼 나는 옆에서 아버지에게 낙인이 찍히도록 열심히 아버지의 ‘쓸모없음’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수급 자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가나 심의는 아버지의 남은 기력이나 역량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는 제도와 일상의 간극을 혼자서 메우는 것도 지친다.

“기타 질환으로 써드릴게요.”

며칠 전 바뀌었다는 아버지의 주치의가 선뜻 의료급여 연장 신청서를 써줬다. 지난번 주치의였다면, 진료실 안에서 내가 싹싹 빌었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의학에 삶의 모든 판단을 맡겨버린 제도에 대한 원망과 열패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래도 이번에 받은 신청서 덕에 얼마간은 꺼질지 모르는 땅 위에서 다시 글과 활동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 어디선가 권태롭도록 반복되는 위기를 혼자 감당하고 있을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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