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단어가 잘 안 떠오른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요즘엔 더 잦아졌다. 뇌 기능이 조금씩 뒷걸음질친다. 수업 때 수십 종의 개 이름을 다다닥 읊어주고 그걸 그저 ‘개’라고만 하는 말의 폭력성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 순간 떠오른 말은 ‘발바리’밖에 없었다. ‘풍산개, 삽살개, 셰퍼드, 불도그, 푸들, 닥스훈트’, 하다못해 ‘진돗개’는 어디로 갔나.
그래도 말에 장애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 좋은 점이 있다. 허공에 빈손 휘젓듯 머릿속을 뒤적거리다 보면 상실된 것 주변에 아직 상실되지 않은 나머지들이 날파리처럼 몰려드는 걸 보게 된다. 머릿속 낱말들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짐작할 수도 있다.
흔히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딴 말로 풀어 말한다. 일종의 번역인데 ‘칼’이란 낱말이 떠오르지 않아 ‘뾰족하게 생겨 뭘 자르는 거!’라는 식이다. 비스름한 말만 맴돌기도 한다. ‘강박’이란 말이 안 떠올라 ‘신경질, 편집증, 집착’이, ‘환멸’ 대신에 ‘혐오, 넌덜머리, 염증’이란 말만 서성거린다. 비슷한 소리의 단어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속물’이란 단어가 안 떠올라 첫 글자가 ‘ㅅ’인 ‘사람, 선물, 사탄, 사기’란 말이 움찔거리다가 이내 사라진다. 혼자 하는 말잇기놀이 같다.
부부의 대화 중 잃어버린 말을 찾으려 스무고개를 하는 경우가 심심찮다. 상실된 말 주변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모이지 않으면, ‘그때 걔, 있잖아 걔’, ‘아, 거 그거, 뭐시기냐 그거’ 이렇게 될 거다. 침묵으로 빠져들기 전, 마지막까지 내 혀에 살아남을 말이 뭘지 궁금하다. 부디 욕이 아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