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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나를 지키는 정원, 서석지 / 노은주·임형남

등록 2020-10-27 16:56수정 2020-10-28 02:36

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세월이 하 수상하여 슬픈 소식만 전하는 뉴스와 자의식 과잉의 공간인 소셜미디어(SNS)를 멀리했더니, 마치 방음 성능이 좋은 창문을 닫은 것처럼 고요한 일상이 찾아왔다. 이런저런 소음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의 길을 가면 좋으련만 그 정도의 경지는 아직 요원하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은 다산 정약용의 ‘수오재기’라는 글에 잘 나와 있다. 수오재는 “나(吾)를 잃지 않고 편안하고 단정하게 수오재(守吾齋)에 앉아 계시”는 큰형 정약현의 집 거실 이름이다. 수오재기는 평생 부침이 심했던 다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쓴 글이다. 가끔씩 꺼내 읽다 보면, 늘 감동이 일고, 휴대폰도 소음도 없고 세상의 번잡함도 사라진 처소에서 몇시간이라도 있다 오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가을이 깊어간다. 이맘때면 은행나무가 비 뿌리듯 노란 잎을 떨구는 모습을 보러 가고 싶다. 특히 영양 서석지 남서쪽 모퉁이에 훤칠하게 서 있는 품이 넉넉한 은행나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서석지는 조선 중기인 1613년에 정영방이라는 사람이 조성한 정원이다. 우리나라에 몇곳 남지 않은 전통 정원으로 유명하지만, 영양이 워낙 멀게 느껴져서인지 언제나 한적한 편이다.

서석지의 구성은 단출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네모난 연못 하나(서석지·瑞石池), 왼쪽으로 높고 넓은 건물 하나(경정·敬亭), 맞은편으로 세칸짜리 작은 집 하나(주일재·主一齋)가 보인다. 그게 전부다.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 정도 됐다고 하니 아마 이곳을 만들 때 심은 모양이다. 정영방이 집을 지을 때 땅에 있는 돌을 살리고 물길을 살려 연못을 만들면서 상서로운 돌이 있는 연못, 즉 서석지라고 부른 이름이 그대로 당호가 되었다.

60여개의 서석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생동감 넘치게 서 있고, 그걸 바라보며 높다랗게 앉아 있는 경정도 멋지지만, 나는 소박한 주일재가 가장 흥미롭다. 주일재의 존재에 대해서 사람들은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데, 주인이 “과연 이 의미를 알아볼 수 있어?” 하고 물어오는 것만 같다. 손님들을 위한 공간인 경정은 화려하다 싶게 높고 크고 전망이 좋지만 그게 전부다. 반면 주일재는 크기도 작고 단아해서 언뜻 부속건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 이르러야 서석지 경관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주인의 공간인 것이다. 화려하지만 단순한 경정과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주일재의 구성은 자의식 과잉의 현대건축과 크게 다르다.

사람들의 거친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의 소란함에 방해받거나 주목받지 않고 나를 드러내지 않으며 나에게 충실한 공간, 서석지에 올해는 꼭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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