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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계의 창] 일본의 자화상 / 야마구치 지로

등록 2020-11-01 15:56수정 2020-11-02 02:39

야마구치 지로 ㅣ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나라가 붕괴된 뒤 어느 정도 회복이 되던 1960년께부터 일본인들은 자국을 아시아 중 유일한 선진국으로 여겨왔다. 일본은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경제성장을 이뤄 자동차, 전기를 중심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을 거느리고 무역 흑자를 쌓아갔다.

국민의 건강 수준은 높고 장수 사회가 실현됐다. 치안도 좋고 교육 수준도 높은 것을 일본인들은 자랑으로 생각했다. 고도성장기는 미나마타병 등 세계 최악의 공해문제를 발생시켰지만 1970년대에는 환경 규제를 강화하고, 에너지 절약도 진행됐다.

1990년대 거품경제가 끝나고 저출산,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21세기 초에는 인구 감소가 시작돼 세계화에 따라 생산거점이 해외로 이동했다. 금세기 들어 일본인의 노벨상 수상이 잇따랐는데, 이는 20세기 후반 일본 과학연구 유산에 대한 사후적인 성과다.

최근 일본이 선진국에서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사례가 계속되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기계 회사인 미쓰비시중공업은 2008년부터 첫 일본산 제트여객기 ‘스페이스제트’(MRJ) 개발을 추진해왔는데 최근 중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개발이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19 확산으로 여행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원자력발전이나 호화 여객기 등 대표 분야에서 손실이 나자, 위험이 큰 여객기 사업에서 철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도시바나 히타치 등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회사도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있다. 현재 무역 흑자를 내는 것은 자동차 산업뿐이다. 하지만 전기자동차 개발에 도요타도 뒤처져 있어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환경보전이나 에너지 절약 기술에 대해서도 이전에는 세계 최첨단을 달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재생가능 에너지와 배터리 기술에서 뒤처져 있다.

이런 정체는 기업의 경영 실패도 큰 원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20세기 후반 성공 경험에 얽매여 일본 사회가 기술, 조직 운영, 교육 등 각 방면에 쇄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기업의 경영자는 대학 등 교육기관에 개성 있는 인재를 키우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대학을 졸업하는 청년을 비슷한 시기 한꺼번에 채용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인재 확보라는 명분으로 대학 3학년 때부터 인턴십이나 채용 준비를 진행해 대학생활 4년 중 1년 반 정도는 취업활동에 소비한다. 대학에서 사고력, 표현력을 키우는 데도 제약이 클 수밖에 없다. 복장부터 시작해 면접에서 말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매뉴얼화돼 있어 청년들이 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는 제2의 패전과 맞먹는 상황으로 이전의 성공 경험을 버리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나가는 기회가 되어야 했다. 앞으로 반년이 지나면 그 충격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지만 일본은 새로 태어나는 것과 정반대로 기존의 구조를 계속 지키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원자력발전이다. 세계는 재생에너지 비용이 낮아져 전체 에너지 중 재생가능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제1원전에 쌓여 있는 삼중수소 오염수를 해양으로 방출하겠다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또 중단된 원자력발전소의 재가동 움직임도 있다. 그 사고에 대해 누구도 책임을 추궁당하는 일 없이 이전 정책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낡은 방식의 실패가 드러났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실패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체질이 새로운 정책 전환을 가로막고 있다. 20세기 후반 일본의 번영을 알고 있는 것은 62살인 나보다 위 연령대 사람들이다. 과거 번영에 견줘 지금의 쇠약에 대해 위기감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세대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긍정하는 분위기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반항의 기개가 없어지는 것은 망국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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