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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기철 칼럼]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로 가는 길

등록 2020-11-02 17:48수정 2020-11-03 02:38

촛불의 당면한 요구는 자유주의·다원주의와 곧바로 연결된다고 보기 어렵다. 촛불 이후 전개된 상황은 더욱 이와는 거리가 있었다. 여기에는 두 거대 정당의 책임이 크다. 어느 한쪽을 탓하는 게 편할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우리 정치의 비극이다. 지금의 대결 정치가 자유주의로 가는 마지막 보릿고개이기를 바랄 뿐이다.

백기철 ㅣ 편집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얼마 전 집권 여당에 당내 민주주의가 없고, 촛불 이후 자유주의와 다원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보수 야당이 살 길은 이 공백을 메워 자유주의·다원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원로 정치학자의 고언을 흘려들을 일은 아니지만 지나친 단순화가 아닌가 싶다.

“촛불 시위 이후 예상과 달리 굉장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최 교수 진단은 뼈아프다. 하지만 여러 상황을 두루 고려한 평가인지는 의문이다. 정치의 상호작용과 유동성을 배제한 일면적 분석은 아닌가. 촛불 이후의 대결적 정치 상황, 고질적인 후진 정치문화, 강고한 보수 기득권 카르텔 등이 제대로 고려된 것인지 회의적이다.

최 교수 바람대로 ‘촛불 이후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적으로 진행됐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격차 해소, 구체제 혁신(정치개혁·검찰개혁)이란 촛불 과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보수 세력의 반발로 개혁은 기우뚱거리기 일쑤였다. 지난해 선거제 개혁을 둘러싼 충돌이 대표적이다. 황교안으로 상징되던 극우 보수의 저항은 현재의 ‘위기적 상황’을 만들어낸 원인 중 하나다.

물론 촛불 이후 개혁이 순탄치 못한 데는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 책임이 크다. 집권 세력의 개혁 추진 능력 부족, 촛불 세력의 내로남불과 분열, 지지그룹의 배타적 행태 등은 ‘위기’의 주요 원인이다.

사법적폐청산 범국민 시민연대가 지난해 9월 검찰 개혁과 조국 법무부 장관 수호를 주장하며 검찰청사가 있는 서울 서초역 사거리에서 `제9차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검찰 개혁 촛불 문화제'를 열고 있다.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사법적폐청산 범국민 시민연대가 지난해 9월 검찰 개혁과 조국 법무부 장관 수호를 주장하며 검찰청사가 있는 서울 서초역 사거리에서 `제9차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검찰 개혁 촛불 문화제'를 열고 있다.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자유주의·다원주의 부재는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지금 상황을 특정인이나 특정 세력이 모든 걸 주도하는 전체주의적 상황으로 보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노무현 이후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하면서 현실정치에서 발언권을 강화해왔다. 당내에서 한 사람이 공천을 좌지우지하거나 정책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시대는 지났다.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 저변이 확대된 측면이 분명 있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에 당내 민주주의가 있었고, 언론 비판도 자유로웠다는 건 일면적 분석이다. 김대중 시대는 굳이 말하자면 1인 보스 정치 시대였다. 노무현 시대에 언론의 비판은 대체로 ‘보수 프레임’을 통한 정권 흔들기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때 당내 민주주의는 때론 ‘적전 분열’의 동의어였다.

지금의 국민의힘에서 자유주의를 찾는 건 ‘연목구어’일 수 있다. 권위주의의 본산은 다름 아닌 국민의힘 전신인 극우 정당들이다. 지난해 선거법 개정 시도는 다원주의로 가는 성격이 있었지만 자유한국당이 걷어찼다.

촛불의 당면한 요구는 자유주의·다원주의와 곧바로 연결된다고 보기 어렵고, 촛불 이후 전개된 상황은 더욱 이와는 거리가 있었다. 여기에는 두 거대 정당의 책임이 크다. 어느 한쪽을 탓하는 게 편할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우리 정치의 비극이다. 지금의 대결 정치가 자유주의로 가는 마지막 보릿고개이기를 바랄 뿐이다.

집권 세력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합리적 정책으로 유연한 합의를 이끌어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 언론과 야당의 반발로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이 때문에 더욱 개혁에 매달리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검찰개혁의 오랜 숙원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실현을 눈앞에 두고 더불어민주당이 금태섭 전 의원 문제를 처리하는 데 여유를 갖지 못한 게 대표적이다. 아쉽고 아픈 대목이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사르트르와 카뮈가 공산주의를 놓고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사르트르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카뮈는 당대 지식인 사회의 이방인,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한 카뮈의 당시 평가가 정확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편은 카뮈였다.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의 다른 지식인들보다 훨씬 빼어나다”고 일찌감치 그를 평가했다.

요즘 같아선 정말 역사의 편에 선다는 게 어떤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카뮈가 섰던 ‘우파의 길’이 곧 지금 역사의 편이란 법은 없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한편으론 구체제를 혁파하고 기득권으로 점철된 주류를 교체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내로남불을 반성하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필요하지만, 촛불의 전망과 구체적 과제에 대해 책임있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촛불 이후 4년이 흐른 지금은 혁명의 시대도, 리버럴리스트의 시대도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은 구체제와 신체제가 교차하고 프레임과 프레임이 충돌하는 혼돈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역사의 편, 진실의 편을 가리기 어려운 시대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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