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기업의 복장을 한 참가자들이 지난 9월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조기현 ㅣ 작가
“왜 짐을 혼자 짊어져요!? 같이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다쳐요.” 며칠 전, 작업실 이사를 하며 짐을 옮기다 이삿짐 업자에게 혼났다. 어디 가서 제대로 힘 한번 써본 적 없는 책상물림 취급을 받았다. 나는 성인이 된 뒤 대부분을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육체노동으로 벌어먹고 살았다. 몸을 쓰는 건 늘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매번 사람들에게 지적받는 습관이 있다. 왜 위험한 일을 혼자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 몸에 훈육된 노동의 흔적을 느낀다. 내가 직업반을 마친 19살 때부터 공장을 다니며 몸에 새겨진 한 가지, 위험해도 혼자 해낼 것.
2020년 12월10일은 고 김용균 노동자의 2주기다. 4년 전, 구의역에서 사고가 난 김군도, 올해, 생활폐기물 파쇄기에 사고를 당한 고 김재순 노동자도, 모두 혼자 일했다. 내가 살아 있는 건 순전히 운이다. 나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늘 혼자 일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운이 따라서 살아 있고, 지금은 글로 밥벌이를 하기에 일하다가 죽을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직 몸을 쓸 때 혼자서 위험을 ‘감수’하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는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차출(?)돼서 간 직업반이었다. 타의 반 자의 반으로 가게 됐지만, 그곳에서 비로소 배움과 일의 즐거움을 느꼈다. 가스용접으로 배관을 봉합했고, 다양한 전기 배선을 해보며 전기 제어를 익혔다. 처음으로 같은 반 학생들끼리 동료 의식도 생겼던 것 같다. 옆 친구가 배관을 잘못 꺾을라치면 바로잡아주고, 전기 배선을 헷갈려 하면 알려주면서 함께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배움과 일의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공장에 들어가서는 위험해도 혼자 일하는 모습을 보고 배웠다. 지하철의 환풍기를 보수하기 위해 에이에스(AS)를 따라나선 때였다. 환풍기는 깊은 낭떠러지 앞에 놓여 있었다. 같이 나간 선배 노동자는 주변을 돌더니 버려진 밧줄 하나를 주워서 자신의 허리춤에 묶었다. 그게 안전장치의 전부였다. 처음 본 아찔한 현장이어서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선배 노동자가 떨어져서 산산조각이라도 날 것 같은 불안에 내가 밧줄을 잡고 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배 노동자는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다른 일 하고 있으라”며 거절했다. 누군가의 안전을 지키기보다 일 하나 더 하는 게 중요했다.
혼자 작업하다가 안 될 것 같아서 선배 노동자를 부르면 쌍욕을 먹었다. 왜 혼자 처리하지 못하냐는 게 이유였다. 그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혼자 감수하고 말겠다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 혼자 드릴을 뚫다가 작업복 바지가 말려들어가 살점이 뜯어져도, 혼자 챙기고 다니던 응급약을 바르는 것으로 처치하기 일쑤였다. 그 정도 사고들은 무용담으로 흘려보낼 뿐이었다.
늘 작은 공장이나 일용직으로 건설 현장을 다니다 보니 노동조합을 만난 적은 없다. 공장의 선배 노동자들도, 일용직 건설 노동자들도 단결이나 교섭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경험이 전무했다. 다만 풍문처럼 노동조합에서 시위만 하다가 모았던 재산 다 까먹었다는 공장장의 경험 정도만 들려왔을 뿐이다.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노동조합을 폄하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노동조건을 문제 삼고 목소리를 낼 방법이 없다고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의 안전을 신경 쓰게 만들려면 책임자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혼자 일하다가 죽지 않을 권리가 ‘운’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은 너무 비겁하다. 나의 몸에 깊게 새겨진 안전불감증은 이 비겁한 세상의 증상일 것이다. 한해 2400명,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여전히 위험을 홀로 감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