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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기철 칼럼] “법 앞에 만명만 평등하다”던 노회찬의 절규

등록 2020-12-14 15:58수정 2020-12-15 02:40

‘삼성 엑스(X)파일 사건’의 큰 줄기는 ‘떡값 검사’ 등은 모두 빠져나가고 의혹을 제기한 노회찬만 유죄 판결로 의원직을 잃었다는 것이다. 현실 법정에서 그가 검찰·법원의 ‘사법 기술자’들에게 희생됐지만 역사의 법정에선 무죄다. 당시 사건을 검찰이 수사한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만약 공수처가 있었다면 재벌과 검사의 유착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백기철 ㅣ 편집인

지난주 여당이 야당의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한 뒤 고 노회찬 의원이 소환됐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조국은 “그가 기뻐했을 것”이라 했지만, 진중권은 “노회찬이 찬성했을 것 같냐”며 정의당 수뇌부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 세상에 없는 노회찬을 두고 논쟁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지만 그가 공수처, 즉 검찰개혁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당사자인 건 분명하다. 노회찬은 이 시대 검찰개혁의 절박성을 온몸으로 웅변한 상징적 인물이다.

노회찬의 정치 역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이른바 ‘삼성 엑스(X)파일 사건’이다. 2005년 8월 국회 법제사법위원이던 노회찬은 1997년 대선 전 삼성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비밀 대화를 도청한 안기부 녹음파일을 공개했다. 삼성의 대선자금 제공 의혹과 함께 7명의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하면서 전면 수사를 촉구했다. 노회찬의 ‘고난의 행군’의 시작이었다.

2005년 8월18일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의 명단을 공개할 당시의 노회찬 전 의원. <한겨레> 자료 사진
2005년 8월18일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의 명단을 공개할 당시의 노회찬 전 의원. <한겨레> 자료 사진

엑스파일 사건의 큰 줄기를 말하자면, 범죄 의혹이 제기된 ‘힘센 이’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홀로 목소리를 높인 노회찬만 유죄 판결로 의원직까지 잃었다. 노회찬은 현실 법정에서 ‘자본 눈치보기’와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검찰과 법원의 ‘사법 기술자’들에게 희생됐지만 역사의 법정에선 분명 무죄다.

당시 녹음파일을 통해 떡값 검사 리스트의 실체가 명확히 드러났음에도 고위 검사 두어명이 옷 벗는 선에서 흐지부지됐다. 이 사건을 검찰이 수사한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만약 공수처가 있어서 검사들에 대한 수사가 이뤄졌다면 재벌과 검사의 유착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수 있다.

노회찬은 <노회찬과 삼성 X파일>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을 거론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역설이 증명된 게 바로 엑스파일 사건이라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것이 아니라 만명만 평등한 것 아니냐”고 했다.

공수처법을 두고 노회찬이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는 정말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그의 언행으로 볼 때 노회찬만큼 고위 공직자, 특히 검사·판사들의 세상, ‘그들만의 리그’를 깨트려야 한다고 생각한 정치인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가 20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공수처 법안을 제출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가 법원 쪽에 공수처장 추천권을 주는 등 권력 견제에 민감했다는 점에서 이번 개정안에 상당한 우려를 가졌을 수는 있다.

정의당이 이번 결정을 내린 과정은 노회찬의 유지에 나름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에 찬성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결정하기까지 치열하게 토론했고 분명한 결론을 내렸다. 소신에 따라 당 결정을 이행하지 않은 의원도 존중했다.

정의당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역사의 편에 서서,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책임감 있게 대처했다. “검찰 특권 앞에 노회찬 같은 의인이 희생되는 불행한 역사를 끝내기 위해 공수처 설치는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김종철 대표의 말은 울림이 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민주주의 원칙 훼손”을 이유로 기권표를 행사한 것도 존중받을 만하다. 또 더불어민주당의 조응천 의원이 평소의 소신에 따라 기권표를 행사한 것을 두고 징계 운운할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이들은 주역은 아니더라도 지금 상황의 소중한 조역일 수 있다.

다만 이들의 소신이 사안의 선과 후, 주와 종, 역사적 소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인지 회의적이다. 공수처법 개정안이 ‘부분이 전체를 훼손할 정도로’ 그 취지와 설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공수처법의 문제를 지적하는 주장들이 부분과 전체를 혼동하고 있는 것 아닌가. 모든 걸 한순간에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다. 한 걸음 나아간 뒤 문제가 있다면 고치고 보완해야 한다.

책임이나 역사 따위를 말하면 뭔가 구리고 기득권이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걸로 치부하는 건 신중하지 못한 태도다. 실제로 기득권에 연연하는 이들이 없지 않겠지만 역사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도 아주 많다. 내로남불과 독선·오만에 대한 자기성찰과 비판이 곧바로 시대적 과제의 무력화, 실종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지금 일부 언론과 정치인, 지식인들이 상황의 역사성, 지식인의 진짜 책무를 망각하고 무책임한 비판과 자기만족적 도덕주의에 빠져 상황을 호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의 고뇌 어린 선택을 존중한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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