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이 지제크 ㅣ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우리는 아직도 코로나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코로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희생양들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자주 듣는 “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와 같은 말도 실은 코로나에 대한 우리의 투항을 표현하는 말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올해 초 대유행 때 보였던 반응은 돌이켜보면 위협에 직면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어느 정도 당연한 반응이었던 것 같다. 당시 초점은 감염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였다. 하지만 상황이 다시 악화하고 있는 지금은 대다수 국가에서 코로나를 정말로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많은 이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서유럽만 보자면) 크리스마스를, 겨울 휴가를 예전처럼 보낼 수 있을까 수준이다.
‘코로나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식의 이런 태도는 낙관주의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좌절, 그리고 국가 조치에 대한 거부감이 섞여서 표현된 결과에 가깝다. 지금 작동하는 것은 공포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공포의 단계를 지나 우울증의 단계에 와 있다. 우울증은 우리의 욕망 자체가 사라졌다는 신호다.
지금 우리가 겪는 방향 상실의 한 이유는 이 감염병 유행의 인과관계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감염병 위기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자연재해인 동시에 사회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복잡하게 결합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올해 초 코로나가 대유행했을 때 쟁점은 공중보건과 방역이었다. 지금의 연말 대유행에서는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경제적 효과가 큰 쟁점이다. 만약 백신 이후에도 또 다른 대유행이 발생한다면, 그때 쟁점은 정신적 고통, 특히 우리가 과거 일상적으로 향유하던 사회적 삶이 소멸해가는 데 따른 정신적 고통이 될 것이다.
이 사회적 삶의 소멸에 대해 조르조 아감벤은 말한다. 우리가 국가의 방역 조치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를 비로소 인간일 수 있게 해주는 열린 사회적 공간을 포기할 때, 우리는 국가권력에 복무하는 과학기술에 통제된 채 타자와 고립되어 생존만을 갈구하는 기계에 불과한 처지로 전락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우리가 용기를 내어 이전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설령 죽음을 맞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건 곧 우리가 인간임을 포기하고 과거에 누리던 사회적 자유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아감벤이 중요시하는 열린 사회적 공간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삶의 소멸을 그 영점까지 겪어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반면, 과거 오래된 삶의 방식에 머무르고자 할 때, 우리는 새로운 야만에 직면한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주장하며 국가 방역 조치에 항의하는 미국과 유럽의 시위대가 그 야만의 한 예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휴먼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감염병, 지구온난화, 인간 삶의 디지털화와 같은 현상들이 우리의 인간성을 표지하는 기본 좌표들을 침식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휴머니티를, 또는 우리의 포스트휴머니티를 어떻게 재발명해야 할 것인가?
아감벤은 얼굴이야말로 타자의 심연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기대어, 우리가 얼굴을 마스크로 가릴 때 우리는 타자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프로이트적’으로 답하겠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가가 상담 치료를 진행할 때 내담자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프로이트에게 얼굴은 기본적으로 거짓말, 즉 궁극적인 마스크였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게 타자의 심연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타자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었다.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임무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삶의 방식을 구축하고 발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