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5부요인 초청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승근 ㅣ 논설위원
2003년 10월3일 호젓한 개천절 휴일, 청와대 춘추관이 도떼기시장이 됐다. 춘추관 2층 베란다에 자리를 마련한 노무현 대통령은 “참모들은 나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기자들과 커피 한잔하려고 왔습니다. 괜찮죠?”라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귀국한 송두율 교수에 대한 검찰의 ‘친북 활동’ 조사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지금까지 관계기관에서 적절히 처리하고 있다. 너무 정치적인 공방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송 교수가 청와대 초청 명단에서 빠진 것에 대해서도 속마음을 털어놨다. “나는 범죄 혐의가 있으면 조사받고, 그것과 다른 의미로 우리 사회에 많은 사람들이 해외 민주인사를 초청하고 싶어 하는 만큼 가급적 빠지지 않고 초청되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실무자들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뺀 것이다.”
2005년 ‘6·25는 북한이 일으킨 통일전쟁’이라는 강정구 교수의 글을 두고 세상이 시끄러웠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친북인사를 양성해 사회주의 체제로 이끌고 가려고 하느냐”며 대통령의 답변을 요구했다. 노 대통령은 “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정도의 발언은 용납되어야 할 자유가 있다”며 강 교수 구속에 반대했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불구속 수사 지휘를 했다. 검찰총장은 물러났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 임명과 검찰의 저항, 대선자금 수사, 대연정,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 이라크 파병 등 논란이 큰 의제에 직접 뛰어든 노 대통령은 수없이 공격을 받았다. 언론은 ‘막말 논란’ 등을 부추기며 대통령의 품격에 시비를 걸었다. 탄핵소추도 당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재임 기간 무려 150회나 직접 브리핑과 기자회견에 나섰다. 퇴임 뒤 검찰의 보복수사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폐족’을 자처한 친노무현 세력이 주류로 떠오르고, 9년 만에 문재인 정부가 출현한 건 이런 노무현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국민들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뒤엉킨 난제에 뚜렷한 소신을 밝히며 논쟁을 피하지 않던 그의 탈권위 행보와 진정성에 공감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2017년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고, 퇴근길에 남대문시장에서 시민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3년7개월, 그 약속은 흔적으로 남았다. 지금까지 직접 브리핑과 기자회견은 6차례에 그친다. ‘불통의 아이콘’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도 한번 더 했을 뿐이다. 취임 뒤 1년 동안 대통령 행사 자체가 감동과 위안을 주던 시절도 있었다. 이젠 탁현민 비서관이 연출하는 행사에 대한 피로감과 역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문 대통령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잘 짜인 각본에 따른 행사와 각종 회의를 통해 전달되는 ‘말씀’으로 국민과 소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정책, 그 결과는 참담하다. 젊은 세대가 부나방처럼 ‘영끌’, ‘빚투’에 뛰어든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갈등이 1년 가까이 이어진다. 문 대통령의 패착을 얘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속시원한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일 “드디어 백신과 치료제로 코로나19 사태의 긴 터널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데 확진자 급증, 백신 수급 차질, 병상 부족 사태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문 대통령이 ‘케이(K) 방역’ 신화, 국산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대한 기대 때문에 실기한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또 어떤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입법을 다짐한 것만 12번이다. 고 김용균씨 어머니는 찬 바람 부는 국회 앞에서 12일째 단식농성 중이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절규한다. 문 대통령은 계속 침묵한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문 대통령의 표정이 어둡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난제가 많을수록 소통하고 설득해야 한다. 지도자는 불리하고 어려운 것에 대해 더 열정적으로 이해를 구하고, 국민을 한데 묶어야 할 책임이 있다. 반대자들을 불러 술잔을 기울이며 민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정치의 사법화’, 대통령 권한 위축은 가장 큰 스피커를 가진 문 대통령 스스로 그 스피커를 껐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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