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30일 트럼프 대통령의 새해 국정연설에서 탈북자 지성호(현 국민의힘 국회의원)씨가 목발을 들어보이며 트럼프 대통령의 소개에 화답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박민희
논설위원
지난 미국 대선에서 중국과 홍콩의 여러 민주화운동가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것은 곤혹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시진핑 시대’ 중국의 인권 악화를 우려하는 망명 중국인들,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시행 뒤 절망한 홍콩인들 일부가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거친 ‘중국 때리기’가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이들은 기대했다.
반론과 성찰도 있었다. 중국 최초의 에이즈 환자 지원단체인 아이즈싱을 세워 인권운동을 하다가 여러 차례 투옥된 뒤 미국에 머물고 있는 완옌하이는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중국 공산당과 싸우길 원하더라도 괴물이 또 다른 괴물을 잡아먹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중국을 변화시키는 길은 중국인들이 민주주의에 참여하도록 변화시켜가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인권을 중국 때리기에 이용할 뿐 민주와 인권에 진심이 없는 트럼프 같은 강자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중국인들이 스스로 변화를 만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연대하자는 그의 말에 공감한 이들도 많았다. 나도 그의 생각을 지지한다. 인권이란 외부의 강자가 시혜처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 인권에 대해서도 같은 고민을 해왔다. 북한의 강제수용소와 고문, 성폭력과 자의적 구금 등의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북한 사람들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북한 인권을 이용하는 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하는 전단 살포와 대북 확성기 방송 등을 처벌하는 남북관계발전법(대북전단금지법)을 둘러싸고 국제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엘리엇 엥걸 하원위원장, 크리스 스미스 하원의원 등 미국의 여러 정치인이 대북전단금지법이 북한 인권 증진 노력과 표현의 자유를 훼손한다며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청문회도 열겠다고 한다.
미국 정치인들은 우선 일부 탈북민단체들이 미국 등에서 거액의 지원금을 받아 수없이 날려보낸 대북전단으로 과연 북한 인권과 북한인들의 삶이 나아졌는지 질문해보기 바란다. 대북전단이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살아가는 120만 한국인들의 삶에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도 함께 살펴보길 권한다. 표현의 자유와 인권은 너무 소중한 가치이기에,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민주화를 외치며 ‘구원자’를 가장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중동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했고, 미국 쇠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지를 교훈 삼으면 좋겠다.
국내 보수세력은 일부 탈북단체들과 손잡고 미국을 ‘주전장’으로 삼아 남북 화해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북한 인권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해왔다. 이는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북한인권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18년 1월30일 트럼프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북한의 잔혹한 독재정권보다 자국민을 철저히 야만적으로 억압한 정권은 없었다”며 6분 동안 북한 인권을 거론했다. 이 자리에서 목발을 짚고 1만㎞를 걸어 탈북했다는 지성호씨는 ‘목발의 영웅’으로 환호를 받았고, 그는 이런 명성을 발판으로 지금 국회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악의 축’ 압박도, 트럼프의 ‘극과 극’ 외교도 북한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국의 진보가 북한 인권에 대해 보여온 태도도 더 이상 정답은 아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가 정착돼 북한 경제가 발전하면 그곳의 인권도 개선될 것이라는 이들의 구상은 큰 틀에서 맞다. 하지만 북핵 문제가 오랜 시간 답보하면서 진보가 인권 문제를 북핵과 남북관계의 뒷전에 미뤄둔 채 방치한다는 실망이 커졌다. 탈북민들은 진보가 우리를 외면한다고 좌절했다. 극우·보수는 이들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고, 이들이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탈북민 출신 분단학 연구자인 주승현 고신대 교수와 이 문제를 얘기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보수와 진보가 북한과 탈북민을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있다. 젊은 탈북민 가운데 진보적인 이들이 많은데 진보가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제 진보도 남북 화해와 평화를 진전시키는 동시에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때가 됐다.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하게 민주화를 이뤄냈음을 자부하는 한국이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일관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진보 정치인들과 시민단체들은 탈북민들과 더 많은 교류와 협력을 해야 한다. 인권이 ‘괴물’에 악용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