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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반 미터의 비밀 / 노은주·임형남

등록 2021-02-02 13:57수정 2021-02-03 02:39

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세계의 많은 건축물이 소개되는 외국의 건축 웹진을 보다가, 가끔 사진만 봐도 “저건 한국 건물이네” 할 때가 있다. 그게 어떤 건물인가 하면 앞면은 반듯하게 수직으로 벽이 서 있는데 뒷면이나 옆면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처럼 사선으로 깎인 건물들이다. 그건 ‘일조권 사선제한’이라는 우리나라 건축법에 있는 조항 때문이다. 주거지역에서 앞집의 높이를 조정해서 뒷집의 해를 가리지 않게 하는, 이를테면 이웃집에 대한 배려를 법으로 정량화한 규정이다.

그런데 취지와는 달리 이 규정에는 문제가 좀 있다. 북쪽으로 일정 거리를 이격하게 만들어 해가 들지 않는 응달에 공지를 만들게 된다는 점이다. 만약 처음에 시행할 때 남쪽으로 이격하게 했다면 양지바른 남쪽으로 공지가 생겨 쓸모가 있었을 텐데,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북쪽으로 빗각의 건물들이 줄줄이 서 있는 이상한 풍경을 만들게 된 것이다.

국토부의 수장이 바뀌며 획기적인 주택공급을 위한 조치로 ‘일조권 제한’ 완화도 검토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의 주택문제가 ‘획기적으로’ 공급을 늘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닐 것이지만, 막상 덕분에 일조권 제한이 없어진다는 말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법도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는 게 당연한데, 유난히 건축 분야에는 고쳐야 할 해묵은 규정이 많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민법에 있다. 민법 242조에는 ‘경계선 부근의 건축’이라는 제목 아래 “건축물을 축조함에는 특별한 관습이 없으면 경계로부터 반 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반 미터’라는 구수한 어휘는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남긴 한마디 같다.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50㎝라는 구체적인 이웃 간의 거리를 정해놓은 것일까?

그 숫자의 비밀은 처마의 길이에 있다. 예전 건물들은 대부분 기와를 얹은 경사지붕이라, 집의 외벽으로부터 평균 50㎝ 정도 바깥으로 처마가 달려 있었다. 그러니 집을 땅의 경계에 바짝 붙여 짓는다면 내 집의 처마가 남의 땅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아마 그런 문제로 생길 이웃 간의 분쟁 소지를 줄이려고 만든 제한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이제는 처마 대신 옥상을 가진 반듯한 건물이 대부분인데 아직도 50㎝를 띄워 짓다 보니 모든 집과 집 사이에는 애매한 폭의 여백이 생긴다. 전국의 모든 집이 품고 있는 그 애매한 면적을 합치면 과연 어느 정도일까 가끔 궁금해진다.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의 시스템이 다양해지면서 사람의 생활양식도 변화한다. 장롱에 고이 간직해둔 채로 소용이 다한 비단보따리 속 물건처럼 쓰임새가 애매한 과거의 습관들은 꺼내어 햇볕에 말려보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는 지혜가 법에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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