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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헌의 바깥길] 2020년 잃어버린 시간 계산서

등록 2021-02-02 16:07수정 2021-02-03 02:39

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억만장자’는 지난해에 무려 3.9조달러를 벌었다. 일자리를 잃거나 일거리가 줄어든 사람들의 노동소득 손실 추정치 3.7조달러와 비슷해서 ‘그 돈이 그 돈 아니냐’는 억측이 생겼다. 여하튼 이들의 연간수입은 G20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해 천문학적으로 쏟아부었다는 돈(12조달러)의 3분의 1에 이른다. 이 정도의 돈이면 전세계 사람들이 백신을 맞을 수 있다고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된 지 1년이 훌쩍 지났다. 그때 유럽에서는, 남의 집에 생긴 나쁜 소문처럼 여겼던 것이 세상의 모든 집 구석구석을 노려보는 역병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읽고 얘기 나눈 것으로 기억하자면 그런 예상은 없었다. 아프리카를 한 계절 스쳐 가는 전염병처럼 여기는 분위기였고, 어느 아시아 신흥졸부의 몰지각한 행실 탓에 생긴 자승자박의 병치레라는 싸늘한 반응도 있었다. 누구도 알지 못한 길에 같이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모른 것인지, 애써 모른 척한 것인지도 묘연하다.

지난해 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미 마당까지 바이러스가 들어섰지만, 뒤늦게라도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머물러 있었다. 참혹한 전쟁 중에도 나다니던 거리를, 이제는 허가증을 가지고서야 나갈 수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온 촌놈이 경탄해 마지않았던 ‘열린 국경’도 닫혔다. 가로등만 조는 듯 깜박거리던 국경 출입국관리소에는 근엄한 제복이 돌아왔다. 나는 여권, 체류증, 근무확인증, 서류 뭉텅이를 보여주고서야 겨우 통과했다. 한때는 바람처럼 지나다니던 곳이었다.

볼멘소리가 나오려 할 무렵 효과가 나타났다. 확진자 수도 줄고 사망자 수도 같이 줄었다. 봉쇄조치로 봄은 잃었으나, 여름은 온전히 즐기겠다는 마음이 컸다. 마치 바이러스가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들떴던 여름, 그 끝은 가혹했다. 바이러스는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난봄의 ‘갇힘’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정부는 제한조치를 다시 도입했으나 빈틈투성이였다. 그 사이로 바이러스는 부단히 옮겨 다녔다. 2020년 1월23일, 중국 우한이 처음으로 바이러스로 빗장을 걸었다. 2021년 1월23일 세상은 아직도 우왕좌왕이다. 1년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잃고도 우리는 백신의 ‘기적’만 바라보고 있다. 유럽의 국경도 다시 닫히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잃은 것일까. 바이러스는 생명만 빼앗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계도 빼앗았다. 그리고 그 규모가 아찔할 정도다. 작년 한해 동안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취한 각종 제한 정책과 이에 따른 경기 침체 등으로 생긴 노동시간 손실분은 8.8%에 달한다. 워낙 큰 수치에 익숙해져서 10%도 안 되는 숫자에 시큰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덧붙이자면, 일주일에 48시간 일한다고 가정하면 2억5천만명의 일자리와 맞먹는 숫자다. 모질었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와 비교하면 작년의 노동시간 손실 규모는 4배 이상 크다. 남미의 경우는 노동시간 손실이 16%를 넘는다. 사실상 일자리의 빈사 상태다.

물론 이런 노동시간 손실 중 상당 부분은 고용은 유지하되 노동시간을 줄여서 생긴 것이다. 총손실의 절반 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적게 일하는 만큼 버는 것도 줄었겠지만, 그 부족분은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메꾸어주었다. 물론 잘사는 나라들에서 괜찮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다.

노동시간 손실의 나머지 절반은 일자리 소멸로 연결되었다. 실업자는 3300만명이 늘었다. 하지만 더 큰 부분은 따로 있다. 통계상으로 일자리를 잃었다고 무조건 실업자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꾸준히 구직활동을 해야 실업자로 ‘인정’받는다. 구직활동을 하지 않으면 경제활동인구에서 아예 제외된다. 이런 사람들은 실업자 수보다 훨씬 많다. 8100만명 정도로 추산한다. 일자리 잃고 구직마저 포기하는 사람들은 경제위기 때 일반적으로 늘어나지만, 이런 규모는 그야말로 사상 초유다.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것이 있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어려운 시기에 더 고생한다는 ‘고생 가속화 법칙’의 유효함이다. 일자리가 없어진 직종은 저임금, 저숙련 직종이다. 청년과 여성이 집중되어 있는 직종이기도 하다. 자영업자의 처지도 아주 어려워졌다. 이 와중에도 굳건한 직종이 있다. 많은 나라에서 고임금 고숙련 직종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거나, 심지어 일자리가 늘어나기도 했다. 금융이나 기술통신 관련 직종은 일자리도 늘고 임금도 늘었다. 세계 전체 평균으로 보자면, 고용감소 규모가 고숙련 직종의 경우는 ‘이상 무’, 중간숙련 직종의 경우는 5%다. 저숙련 직종은 10% 이상의 고용감소를 겪었다. 바이러스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그래서 ‘K(케이)자 회복’이라는 말도 정확하지는 않다. 코로나 위기로 모든 일자리가 타격을 입었지만 회복과정은 양극화되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사실 고숙련 고임금 직종은 처음부터 고용위기에서 비켜나 있었다. 잃은 것이 없으니 회복할 것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회복해야 할 곳에서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없어진 일자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광업이나 일부 도소매업종은 대규모 조정이 불가피해서 바이러스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긴 힘들 것이다. 청년도 마찬가지다. 졸업 후 첫걸음이 어긋나면 평생 회복하기 쉽지 않다. 순탄한 출발을 한 사람보다 실업 위험도 높고 소득도 시원치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을 흔히 ‘낙인효과’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묘사하는데, 이번에는 이 표현마저도 과하지 않다.

일자리를 잃거나 일거리가 줄어든 사람들의 노동소득은 당연히 줄었다. 월급봉투가 약 8.3% 얇아졌다. 액수로 환산하면 3.7조달러 정도 되고, 국민총소득과 비교하면 4.4%에 해당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명암이 갈린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런 노동소득 손실분을 정부가 꼼꼼하게 메꿔줬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경우 노동시간 손실이 20% 안팎 수준인데, 정부 지원 덕분에 실제 소득 손실은 3~4%에 그쳤다.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이런 완충장치가 없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노동시장 충격이 유난히 컸던 페루에서는 노동시간이 59% 줄었고 노동소득은 56% 줄었다. 물론 선진국에 산다고 해서 사정이 같은 것은 아니다. 소득지원 혜택에서도 자영업자와 청년은 홀대를 받았다.

마침 ‘공교로운’ 숫자가 나왔다. 옥스팜에서 지난주 발표한 통계를 보면, 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억만장자’는 지난해에 무려 3.9조달러를 벌었다. 노동소득 손실 추정치 3.7조달러와 비슷해서 ‘그 돈이 그 돈 아니냐’는 억측이 생겼다. 여하튼 이들의 연간 수입은 주요 20개국(G20)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해 천문학적으로 쏟아부었다는 돈(12조달러)의 3분의 1에 이른다. 이 정도의 돈이면 전세계 사람들이 백신을 맞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옥스팜의 보고서 제목은 ‘불평등 바이러스’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간 뒤에도 이 바이러스는 우리 곁에 꽤 오래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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