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16
지난해 7월9일 서울 서대문구 소셜팩토리에서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논란에 대한 청년 긴급토론회 ‘공정같은 소리하네!’가 열렸다. 토론회를 생중계하는 주최자의 노트북 오른쪽 화면에 청년들의 실시간 댓글이 올라오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노력은 누구나 한다. 다른 방식으로 할 뿐이다. 가수 겸 프로듀서 박진영씨는 몇년 전 인터뷰에서 “내가 성공한 것이 노력 덕분인가 운 때문인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노트에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를 죽 적어봤다. 그랬더니 노력은 30%, 나머지 70%는 운이었다. 하늘에 감사했다. 누가 있구나.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진영씨는 하늘에 감사했지만, 마이클 샌델 교수는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는 명제는 오래전부터 진보의 가치를 대변하는 말로 여겨졌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엔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개인과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게 ‘정의롭고 공정한 것’이었다. 정경 유착과 재벌 특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 검찰·경찰의 정치적 수사와 인권침해, 노동자 단결권·파업권을 금지한 법체계 등은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대표적 사례였다. 이런 사안 하나하나가 진보 운동의 핵심 과제로 제시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공정과 정의’는 요즘도 매우 민감하고 뜨거운 주제다. <경향신문> 신년 설문조사를 보면,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공정(40.7%)을 꼽은 시민이 가장 많았다. 평등(14.0%), 자유(13.3%), 협력(13.1%), 성장(10.9%), 평화(8.0%) 가치는 훨씬 낮은 선택을 받았다. 특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스펙쌓기 논란 이후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공공의대 설립에 대한 의대생들의 격한 반발은 ‘공정’ 담론이 현 시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임을 드러냈다. 지금 ‘공정과 정의’ 가치가 지향하는 방향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현 시기 공정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절차적 투명성’이다. 과정과 결과가 유리알처럼 투명해야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승복한다. 투명성은 객관적 수치를 중시한다. 주관적 평가가 개입하는 순간 공정성에 대한 믿음은 무너진다. 젊은 세대가 보기에 가장 객관적이고 투명한 건 ‘시험 성적’이다. 지난해 국가고시를 거부할 정도로 의대생들이 강경 투쟁을 벌인 데엔, 의대 정원 확대보다 공공의대에 대한 반발이 훨씬 컸다고 한다. 지역 공공의대를 설립하면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들어오는 게 “솔직히 기분 나빴다”고 한 의대생(예과 2학년)은 말했다. “의료서비스의 질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자격이 안 되는 이들이 (의대에) 들어오는 게 기분 나쁘다는 반응이 학과 단톡방에 많이 올라왔어요. 그런 정서는 재수, 삼수를 한 선배나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의대에 입학한 선배들한테 훨씬 강했어요. 어떻게 해서 의대를 들어왔는데, 수능 상위 1%가 (의대 합격) 마지노선인데, 우리는 고교 때 그 성적을 얻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고 경쟁에서 이겨서 여기 들어왔다는 자부심이 있는데, (의대) 문턱을 낮춰서 학생을 받겠다니 이게 공정한 것인가, 그런 얘기가 많았어요.” 인천국제공항공사 논란을 꿰뚫는 정서도 비슷하다. 여기선 수능성적 대신에 공기업 입사시험이 노력과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로 간주됐다. 지난해 6월23일 개설된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화 그만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엔 한달 만에 35만여명이 서명했다. 이 청원 글은 “이곳(공기업)을 들어가려고 스펙을 쌓고 공부하는 취준생들은 물론 현직들은 무슨 죄입니까”라고 항의했다. ‘누구는 그 어렵다는 시험을 거쳐 입사하는데, 몇년 비정규직 했다고 정규직으로 전환해준다니 이게 공정한가’라는 반문이다. 박용호 인천대 교수(창의인재개발학과)는 어느 기업 젊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던 경험을 이렇게 전했다. “젊은 직원들은 인사가 완벽하게 투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가령 최고경영자에게 3배수로 승진 후보자를 올릴 경우, 3배수를 뽑는 과정은 물론이고 최종 승진자도 근속연수·근무평가 등 수치화된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고경영자가 경영철학 등 주관적 요소를 반영해 2·3순위자를 승진시키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수치화된 인사 점수는 100% 객관적인 것일까. 수능시험 성적은 학생 능력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을까.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사교육을 받은 학생이 지방 농어촌 학생보다 높은 점수를 얻는 건 전적으로 그의 능력 덕분일까. 수년간 공항 보안검색 업무를 담당해온 비정규직의 노력과 업무 노하우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시험을 통과한 신입사원보다 떨어진다고 볼 수는 있을까. 시험 성적에 의존하는 ‘공정’은 절차적 공정, 절차적 정의에 갇히기 쉽다. 시험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치르니 부정행위만 막으면 공정성은 확보되는 것처럼 보인다. 교육환경의 차이나 교육제도와 같은 좀 더 커다란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 밑바탕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면(정확히는 보장되는 것처럼 느끼면) 그에 따른 성과와 보상은 정당하다는 ‘능력주의’가 깔려 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은 ‘능력주의’의 미국식 표현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훨씬 첨예한 ‘공정’ 논란으로 옮아간 데엔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가 놓여 있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 확산은 1980년대 이후 폭발한 교육 열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김윤태 고려대 교수(공공사회학)는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교육을 통한 지위 성취의 열망은 평등주의보다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가치를 강화했고 특히 1990년대 들어 입시에서 학생 능력보다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 중요하게 부각될 정도로 학벌주의를 강화했다. 또 소비가 새로운 지위의 상징이 되면서 소비 양태가 성공을 보여주는 지표가 됐다. 최근 일타 학원강사 이지영씨가 유튜브 방송에서 100억원대의 통장 잔고와 명품 백들을 보여주고 슈퍼카 여러대를 갖고 있다고 ‘자랑’한 건 상징적인 예다. 그 방송이 나간 날, 이지영씨 이름은 모든 포털사이트의 실검 1위를 장식했다. 댓글도 ‘그 정도 노력했으면 그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다’거나 ‘자기 노력으로 일군 것이라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는 게 많다. 능력이 있으면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 건 정당하다는 생각이다. 예전엔 상상하기 힘들었던 반응이다. 그 점에서 지금의 능력주의는 철저히 ‘개인적 능력주의’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사회 전체적으로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자는 얘기는 외면을 받는다. 이지영씨는 개인 사례지만, 이것이 기업에선 막대한 성공보수 지급과 함께 경영진과 노동자의 임금 격차를 급속히 벌리는 걸 정당화하는 기반이 된다. 삼성전자가 세계 초일류기업에 오른 건 ‘한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논리를 입증하는 사례로 종종 활용됐다. 김윤태 교수는 “이것은 ‘공정’을 매우 협소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존 롤스가 말했던 전통적 의미의 ‘공정·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좁은 의미의 절차적 공정만 얘기하는 건 오히려 약육강식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노력은 누구나 한다. 다른 방식으로 할 뿐이다. 가수 겸 프로듀서 박진영씨는 몇년 전 인터뷰에서 “내가 성공한 것이 노력 덕분인가 운 때문인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노트에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를 죽 적어봤다. 그랬더니 노력은 30%, 나머지 70%는 운이었다. 하늘에 감사했다. 누가 있구나.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진영씨는 하늘에 감사했지만, 마이클 샌델 교수는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공정하다는 착각>을 펴낸 샌델 교수는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얻는다면 승리는 온전히 승자의 것이 된다. 이것이 능력주의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핵심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원칙 자체에도 결함이 있다. 성공하도록 도와준 운의 영향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능력주의는 승자를 교만의 길로 인도하고 패자에겐 굴욕을 안긴다는 점에서 공익을 해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은 현 시기 ‘공정’ 담론에선 현저히 약화돼 있다. 박용호 인천대 교수는 “예전엔 사회 전체 차원의 공정, 사회적 정의를 중시했다면 지금은 내가 느끼는 공정과 정의가 훨씬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공정한가,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가, 그 판단의 중심엔 내가 있다. 내 노력에 비해서 다른 사람의 노력은 적은데도 똑같은 성과를 얻는다고 생각하면, 불공정하다고 분노한다. 왜 그럴까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면, 어렸을 적부터 너무 심한 경쟁에 시달려온 탓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노력하면 열매를 딸 수 있던 시대와 달리, 성장 정체 사회인 지금은 노력해도 열매를 따기가 어렵다. 좋은 일자리에 대한 젊은 세대의 강렬한 요청은 그런 단적인 표현일 것이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가 정작 젊은 세대로부터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된 건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런 인식과 정서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던 건 문재인 정부만은 아니다. pcs@hani.co.kr ※ 다음 회엔 ‘공정과 정의’ 두번째 이야기, 젊은 세대 연대는 왜 필요한가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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