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우리의 목숨은 혐오보다 강하다

등록 2021-02-25 15:01수정 2021-02-26 02:40

트랜스젠더 김기홍(맨 왼쪽)씨는 녹색당 비례대표 예비후보로 나서기도 했고, 퀴어축제 활동가였다. 2020년 국회 정론관에서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국회의원 비례대표 도전을 발표하는 모습. 서울/연합뉴스
트랜스젠더 김기홍(맨 왼쪽)씨는 녹색당 비례대표 예비후보로 나서기도 했고, 퀴어축제 활동가였다. 2020년 국회 정론관에서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국회의원 비례대표 도전을 발표하는 모습. 서울/연합뉴스

한채윤ㅣ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한분이 세상을 떠났다. 떠나기 며칠 전 페이스북에 쓴 글은 “우리는 시민이다. 시민. 보이지 않는 시민, 보고 싶지 않은 시민을 분리하는 것 그 자체가 주권자에 대한 모욕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19일, 안철수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서울퀴어문화축제를 거부할 권리도 있다며 굳이 행사를 하려면 도심 외곽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발언한 이후의 글이었다. 또 하나의 게시물은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들을 위해 축복식을 거행했다는 이유로 교단 재판에 회부된 이동환 목사에 대한 것이었다. 감리교 총회 재판위원회는 1심에서 이동환 목사에게 정직 2년을 선고했는데, 여론이 좋지 않은 것을 의식했는지 2월22일에 열린 항소심의 첫 재판을 갑자기 비공개로 바꾸었다. 이 목사와 변호인 1명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이런 변칙 때문에 재판이 파행되었다는 기사를 공유했다. 그리고 2월24일, 유서에 “너무 지쳐서 쉬고 싶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났다. 차별과 혐오는 아무리 많이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매일 낯설지만, 매번 느끼는 아픔과 슬픔이 지겹다. 이것이 소수자들이 감당하고 있는 삶의 무게다.

흔히 성소수자는 불행할 거라고 추측하지만 그런 예상만큼 불행하진 않다. 그보다 행복할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차별하고 혐오하는 세상에서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가해지는 압력만큼은 힘겹다. 그래서 나름의 숨구멍을 만들게 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퀴어문화축제다. 1년에 한번, 나와 같은 존재들을 긍정하고 축하하는 행사가 열리는 것이다. 그 하루에 얻은 힘으로 나머지 364일을, 남은 1년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참가자들의 소감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고, 그 차이 때문에 아름다운 존재임을 느낄 수 있는 뜻깊은 행사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1970년 처음 시작했지만 금세 전세계의 주요 도시로 축제가 퍼지게 된 이유다.

하지만 이런 행사를 두고 한국에선 막말이 쏟아진다. 특히 선거를 앞두면 더 심해지곤 한다. 우리 사회가 퀴어문화축제를 받아들이기엔 시기상조라는 말을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 이르지 못한 건 국민을 진정 사랑하는 정치인을 갖는 일인 듯하다. 정치인들은 표를 더 얻을 수만 있다면 국민의 일부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일에 서슴없이 동참한다. 마치 누가 누가 더 성소수자를 잘 혐오하는지를 경쟁하는 것처럼. 포괄적 차별금지법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동성애를 반대할 자유를 존중’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들은 퀴어문화축제가 청소년에게 유해할 수 있어서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이런 발언은 청소년 중에서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있다는 사실을 지워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기회를 뺏는 것이 정치인이 할 일인가.

2014년, 서울의 신촌에서 열렸던 퀴어문화축제를 떠올려본다. 그날 십자가를 든 이들이 거리를 막고 선 탓에 행진을 할 수 없었지만 퍼레이드 참가자들은 계속 하나의 구호를 외쳤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세상이 아무리 우릴 미워해도 우리는 세상을 더 힘껏 껴안겠다며 포기하지 않고 외쳤다. 밤 10시쯤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혐오 세력들을 물리치고 퍼레이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외치고 싶다. “우리의 목숨은 혐오보다 강하다! 혐오보다 귀하다!” 세상과 안녕하고 헤어지는 일이 성소수자의 몫이 되지 않도록, 같은 사람을 향해 ‘안 볼 권리’ 같은 잔인한 말을 내뱉고 그 대가로 권력을 쥐려는 저열한 욕심들이 세상과 안녕할 수 있도록 살아남은 자들이여, 끈질기게 버티자. 우리, 더 뻔뻔하게 살아내자. 자신을 위해 주먹을 쥐자.

제주에서도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고,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고 선거에 나가서 싸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김기홍 활동가를 추모하며. 그대, 이제 부디 편안하시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법원 방화까지 시도한 10대 구속, 누구의 책임인가 [사설] 1.

법원 방화까지 시도한 10대 구속, 누구의 책임인가 [사설]

가스 말고, ‘공공풍력’ 하자 [한겨레 프리즘] 2.

가스 말고, ‘공공풍력’ 하자 [한겨레 프리즘]

차기 정부 성공의 조건 [세상읽기] 3.

차기 정부 성공의 조건 [세상읽기]

[사설] 한파 속 파면·구속 외친 민심, 한 대행 더 시간끌기 말라 4.

[사설] 한파 속 파면·구속 외친 민심, 한 대행 더 시간끌기 말라

미국 민주주의의 종말일까 [세계의 창] 5.

미국 민주주의의 종말일까 [세계의 창]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