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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일본, 대한민국의 반면교사

등록 2021-03-23 17:51수정 2021-03-24 02:42

미국 이상으로 그 위상이 쇠락한 나라를 찾자면 바로 일본일 것이다. 일본의 ‘성장 시대’는 과거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국내 총수요가 늘지 않는 상황에서 정권이 아무리 양적 완화를 통해 경제에 돈을 부어봤자 성장 둔화의 추세를 면할 수 없다. 미국은 과도한 군사적 팽창 등으로 부실을 키워온 것이다. 그러면 1945년 이후로는 군비 지출을 자제해온 일본의 패인은 무엇인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1990년대 초 나는 당시에 유행했던 폴 케네디(1945년생) 교수의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1987년)을 읽어본 일이 있었다. 반천년 동안의 패권 정치를 파헤친 명작임에 틀림없었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예측이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미국 패권의 쇠락을 상당히 논리정연하게 논한 그 책에서 저자는 미국을 제치고 패권 국가로 등장할지도 모를 ‘미래의 강자’로 다름 아닌 일본을 지목했다. 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빗나간 예측을 두고 ‘미래 예측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경우’라고 흔히 평가한다.

그러나 사후적으로 케네디를 지나치게 혹평하는 것도 어쩌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비판적 의식을 가진 일부의 전문가를 제외한 서방 세계의 다수에게는 1980년대 중반의 일본이야말로 ‘가장 미래성이 있는 자본주의의 모델’로 보였다. 일본은 미국에 비해 격차가 훨씬 덜한 사회였고 아동 빈곤율(10%)도 미국이 두배나 높았다. 1985년 당시, 일본의 출산율(1.76)도 예컨대 독일(1.36) 등 서구에 비해 다소 높았다. 전체적으로 사회가 훨씬 더 ‘건전하게’ 보였다. 폭력이나 사회적 탈선 등은 고소득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으며, 사회적 응집력은 서방에서 그저 부러워하기만 해야 하는 고수준이었다. 거기에다 일본산 만화 등이 갈수록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추세였다. 일부의 전문가들은 재일조선인 같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서 보이는 일본 사회의 폐쇄성이나 ‘토건 국가’의 내재적 부실성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최고의 나라 일본’(Japan as Number One)을 철석같이 믿었던 다수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30여년이 지났다. 1990년대에 소련 몰락과 인터넷 기술 혁명의 힘으로 미국의 위상은 잠시 회복되었지만, 2000년대 들면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참패 등으로 케네디가 진단한 미국 패권의 쇠락은 지속되었다. 그러니 실패한 침략과 인종주의적 혐오의 정치세력화, 그리고 코로나 방역의 실패 등으로 세계적 구설에 오른 미국 이상으로 그 위상이 쇠락한 나라를 찾자면 그건 바로 일본일 것이다. 우선 일본의 ‘성장 시대’는 과거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국내 총수요가 늘지 않는 상황에서 정권이 아무리 양적 완화를 통해 경제에 돈을 부어봤자 성장 둔화의 추세를 면할 수 없다. 총수요가 늘 수 없는 자명한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비정규직 양산 등이 가져다준 대대적 ‘빈곤화’다. 전체의 38%나 되는 고용노동자가 비정규직인 일본의 빈곤율(15%)은 미국(9%)보다 더 높으며, 평균 임금은 미국의 약 75% 정도밖에 안 된다. 침체되고 격차도 늘어나고 불안에 시달리는 사회인 만큼 온갖 병리 현상도 다 나타나게 된다. 일본의 자살률만 해도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구미권 국가보다 훨씬 높다. 2011년 이후로는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총인구 감소 추세까지 가세되어 ‘일본에 미래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많아지는 것이다.

미국은 케네디의 분석대로 과도한 군사적 팽창 등으로 부실을 키워온 것이다. 그러면 1945년 이후로는 군비 지출을 자제해온 일본의 패인은 무엇인가?

극히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1955년부터 줄곧 권력을 독점한 채 아무리 정책을 그르쳐도 사회의 견제를 피할 수 있었던 자민당이라는 ‘기득권 블록’을 지난 몇십년 사이 일본이 밟아온 하강 곡선의 주요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땅부자’ 정치인들이 삽질 경제를 부추겨 결국 터지고 만 부동산 버블(거품) 현상을 예방하지 못했으며, 기득권자인 만큼 재분배·격차 문제에 둔감해 노동의 불안화와 상대적 빈곤화를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기득권자들이 노동 문제에 무관심한 반면에, 조직 노동의 발언권이 너무나 취약해 격차 해소에 전 사회가 실패하고 만 것이다. 또 기득권자들이 추구해온 폐쇄적 이민 정책이 이민자 유입에 의한 인구수의 유지나 증가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결국 인구 감소를 초래했다는 분석도 있다. 전후 일본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공룡과 같은 자민당이, 결국 일본을 오국(誤國)했다는 진단인 셈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는 한국과 무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일본이 ‘실질적인 준일당제’라면 한국에서는 최근 25년 동안 양당제가 나름대로 잘 정착되어 권력은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문제는, 비록 여야의 날 선 대결이 한국 정치의 무대를 훨씬 더 건전하게 만들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여야가 공유하는 일종의 비공식적 ‘합의 사항’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자민당의 재앙적 정책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환경 훼손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 집권 세력이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보면 삽질 경제에 대한 엘리트들의 ‘초당파적 합의’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공임대주택의 증설 등 여러 진보적 대안이 제시되지만, 보수 정권도 자유주의 정권도 집값을 잡고 거품 형성을 방지하는 데에 여태까지 실패해왔다. 그만큼 세금 혜택까지 받는 등록임대사업자 같은 고소득 다주택자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겨주어 왔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데, 삽질 경제의 지속과 주거 정책의 실패를 보면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느낌이 바로 들 정도다. 이민자 유치를 통한 고령화 시대 노동인구의 확보에는, 한국은 여태까지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더 성공해왔다. 한국의 외국계 인구의 비율이 4.9% 정도인 반면 일본은 그 절반도 안 되는 2.3%에 불과하다. 그러나 외국인 정책의 배타적인 근간을, 한·일이 생각보다 많이 공유한다. 결혼 이주자들은 ‘국민’으로 받아들여 주지만 단순노무자 등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정주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고 (임시적) ‘체류’와 ‘노동’만을 허용하는 정책이다. ‘돈’이나 ‘기술’보다 ‘인재’(人才)가 더 귀한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이런 폐쇄적 정책이야말로 ‘인재’(人災)나 다름없다. 일본에서 이미 실패한 정책을 한국이 굳이 답습해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물론 무엇보다 이미 일본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대중의 빈곤화와 총수요 저하의 원인으로 지목된 비정규직 양산을 왜 여태까지 답습해왔는지 물어봐야 할 것이다.

한때 근대의 모델이었던 일본은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반면교사다. 그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며, 일본이 이미 빠지고 만 그 함정을 우리가 어떻게 피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나마 그 함정을 부분적으로라도 피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이미 거의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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