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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이재용 특별사면론 유감 / 박용현

등록 2021-04-20 15:36수정 2021-04-21 02:37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사면을 받으려면 비밀투표를 통해 동료 시민 6000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인기 높은 유명인이면 모를까 일반 시민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결국 사면 여부는 그것이 정의에 부합하느냐보다는 그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냐에 좌우됐던 것이다. 사면 제도가 특수 계층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부조리의 뿌리는 꽤 깊은 셈이다.

사면은 과거 가혹하고 경직된 법 집행의 완충재로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중세 영국 법은 사람을 죽게 하는 모든 행위를 중범죄로 처벌했기 때문에 실수로 아기를 물에 빠뜨려 숨지게 한 네살짜리 소녀가 투옥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처벌이 과도한 경우 사법적 형평을 맞출 해결책이 군주의 사면이었다. 그래서 단순 사고사나 자연사가 발생해도 책임 추궁을 우려해 사면 청원부터 내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당시엔 사면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어도 그냥 도망하는 쪽을 선택하곤 했다.

범죄의 종류를 지정해 이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을 사면해주는 일반사면과 달리 특정인을 콕 집어 처벌을 면제해주는 특별사면은 본질상 공정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일반사면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특별사면은 그런 견제장치마저 없다. 사법부 판결의 오류나 과잉을 바로잡아야 할 명백한 사유가 없는 한 특별사면이 남용돼선 안 되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대 특별사면 가운데 잘못된 판결을 수정하는 긍정적 기능을 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국민 화합이나 경제 살리기라는 허울 아래 정치인들과 재벌 총수들이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을 면제해주는 특별사면이 남발됐다. 이런 사면은 사법권을 침해하고 법 앞의 평등을 허무는 일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2년6개월의 징역이 확정된 뒤 100일도 지나지 않아 특별사면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으로 인한 반도체 산업 위기론이 빌미다. 이 부회장 쪽이 재상고를 하지 않아 형이 확정된 만큼 재판 결과가 부당하다는 주장은 애초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전형적인 ‘재벌 특별대우론’이다. ‘법 앞의 불평등’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이런 폐습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나.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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