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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폐허의 매혹 / 노은주·임형남

등록 2021-04-27 14:24수정 2021-04-28 02:36

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가족여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놀이시설이 잘 갖춰져 있거나,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많이 찾는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이 건축가인 탓인지 오래된 사찰이나 옛집으로 많이 돌아다닌다. 사실 그런 곳은 구경거리나 놀잇감이 별로 없어 아이들에게는 무료하고 따분한 곳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집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줄곧 그런 장소만 다닌지라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하고 적응도 한 것 같다.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갔던 여행지는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이다. 산들이 포근하게 도시를 둘러싸고 있고, 오래된 시간이 퇴적된 풍경은 편안하고 언제 가도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하나하나 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곳이지만, 그중 우리가 특별히 좋아하는 장소는 경주박물관 맞은편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황룡사 옛 절터이다.

황룡사는 선덕여왕 때 만든 아주 큰 절이었고, 9층 목탑이 우람하게 서 있던 곳이다. 그 너른 터 한가운데에는 무척 큰 장륙존상이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절집을 받치고 있던 돌들만 군데군데 남아 있는 곳이다.

경주에 가면 이런저런 구경을 하며 하루를 보내다, 저녁에 해가 질 무렵 황룡사 터로 달려간다. 마치 하루의 대부분은 그 시간을 위해 보내는 것 같다. 그곳에서 장륙존상을 받치고 있던 우람한 받침돌이나 기둥의 초석에 앉아서 해가 지는 풍경을 본다. 가끔 관광객들이 몰려오기도 하지만,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어서인지 곧 자리를 뜨기 때문에 금세 고요해진다. 간혹 빈터를 지나는 바람 소리 외에는 소리도 절과 함께 시간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멍하니 앉아서 보는 그곳의 일몰은 무척 장엄하다. 이윽고 서서히 땅의 호흡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모여 있는 주초 위로 기둥들이 솟아올라 오고 지붕이 얹어진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턱은 없겠지만 상상 속에서 그림이 마구 펼쳐진다. 절터의 매력이며 단순한 애상을 뛰어넘는 폐허의 매혹이다.

그렇게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욱 많은 것을 보여주는 곳이 폐사지이다. 황룡사야 너무나 유명한 곳이고 역사도 다들 알고 있으며 접근도 편한 곳이지만, 그 외에도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에는 그런 식으로 자취만 남은 절터가 무척 많이 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보면 전국에 기록되어 있는 절터만 해도 수천곳이 된다. 황룡사 터는 그래도 보존도 되어 있고 근처에 전시관도 세워졌지만, 그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방법이 없는 폐사지도 많다.

무성한 풀밭 사이에 얼핏 길이 있는데 그 안에 주초가 몇개 남아 있다든가, 넘어진 석등의 지붕 부분이나 연꽃 문양이 새겨진 받침만 있는 곳도 있다. 그 사라진 부분을 이어보고 세워보는 것은 보는 이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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