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범 l 워싱턴 특파원
얼마 전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을 2차까지 맞았다. 그저 이 시기 미국에 체류하고 있기에, 한국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맞은 것이다. 미국의 공공서비스는 더디기로 유명하지만, 백신을 맞아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지난 19일부터 16살 이상이면 누구나 관청이나 약국 체인 등 다양한 경로로 접종 예약을 할 수 있다. 두번째 접종 때는 대형 접종센터 주차장에 차를 댄 뒤 줄을 따라 건물로 들어가 주사를 맞기까지 겨우 10여분 걸렸다. 의료인들은 물론이고 민간 자원봉사자, 군인, 경찰이 곳곳에 배치돼 모든 동선의 신속하고 안전한 흐름을 도왔다. 주사를 놔준 여성 의료인은 “체계화가 잘됐다”고 자부했다. 5월 말까지 원하는 모든 이의 접종을 마치겠다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목표가 허언이 아니라고 느꼈다.
1년 전을 떠올려보면, 이게 같은 나라인가 싶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당국자들은 “왜 미국은 한국처럼 코로나19 검사를 못 하느냐”는 질문에 시달렸다. 트럼프는 “살균제를 인체에 주입하면 어떻겠냐”는 발언으로 세계를 경악시켰다. 마스크는 쓰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정부 메시지는 혼란스러웠다.
세계의 걱정거리였던 미국이 이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속도전으로 미국 성인 중 54.2%가 최소 1회 백신을 맞았고, 37.3%는 접종을 완료했다. 지난 1월 하루 25만명대이던 코로나19 확진자는 최근 5만명대로, 사망자는 3000명대에서 600명대로 줄었다. 미국은 백신의 국내 공급이 수요를 곧 초과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는 가운데, 젊은이나 농촌 보수층 등 백신 맞기를 꺼리는 이들을 접종시킬 방법을 고민하는 ‘백신 부자’다. 미 듀크대학교 국제보건혁신센터 집계로, 미국은 연내 화이자와 모더나 6억회분을 비롯해 존슨앤드존슨(얀센), 아스트라제네카, 노바백스 등까지 모두 12억1000만회분의 백신 구매 계약을 맺어놨다. 모든 성인에게 세번씩 맞힐 수 있는 분량이다. 한국이 촘촘한 행정력과 국민들의 높은 수용성에 기반해 방역 모범국에 올랐다면, 미국은 축적된 기술과 천문학적 투자를 무기로 백신 강국이 됐다.
그런 미국을 세계가 바라보고 있다. 백신, 원료 물질, 제조 기술을 공유하자는 국제사회와 보건 전문가들의 요청에 바이든 정부는 “미국 먼저”라며 귀를 닫아왔다. 미국은 인도가 생지옥이 됐다는 절규가 한껏 고조된 뒤에야 국내에 쌓아두고 있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타국과 공유하겠다고 밝혔다. 인도에 백신 재료와 치료제 등도 제공하기로 했다. 백신 기술의 지식재산권을 한시적으로 유예해서 백신 생산을 촉진하자는 요구에 대해서도 검토하고 있다고 백악관은 밝혔다. 하지만 미 정부 안에는 아직은 백신을 국외로 보낼 때가 아니라는 반론이 여전하다고 한다. 백신 기술 지재권 유예에는 제조사들이 강력하게 반대한다.
백신 공유의 책임을 미국에만 요구할 수는 없다. 자국민부터 챙기겠다는 것도 비난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한 바이든의 미국에 세계가 기대하는 것은 ‘미국 혼자’ 노선을 달린 트럼프 때와는 다르다. 바이든은 “힘이 아닌 모범으로 세계를 이끌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지난해 7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활동가 아디 바캔과 한 화상 인터뷰에서 ‘미국이 백신을 먼저 개발할 경우 그 기술을 세계와 공유하겠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좋은 일일 뿐 아니라 압도적으로 우리의 이익에도 맞는 일”이라며 “예스, 예스, 예스, 예스”라고 대답했다. 백신에서의 좀더 과감한 글로벌 리더십이야말로 세계가 미국의 복귀를 확실하게 체감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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