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승 ㅣ 논설위원실장
삼성은 자신들의 총수 문제니까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언론은 그래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언론의 ‘삼성 찬가’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갈수록 도를 넘어 목불인견에 이르렀다. 최소한의 객관성도 균형감도 찾아볼 수 없다. 이젠 삼성과 언론이 한몸이 된 듯싶다. 최대 광고주 삼성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삼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이재용 부회장 등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이 납부하기로 한 12조원의 상속세, 감염병 대응과 희귀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 치료를 위해 쓰기로 한 1조원 기부, 2만3천점에 이르는 문화재와 미술품의 국립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기증은 평가할 만한 일이다. 특히 문화재와 미술품 기증은 개인 소장품을 국민에게 유산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12조원의 상속세와 1조원 기부는 명암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거의 대부분의 언론이 이 문제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생전엔 사업보국, 사후엔 통큰 나눔” “작은 거인의 위대한 유산” “재산 60% 사회에…이건희의 마지막 울림” “이건희의 선물, 기부 역사 새로 쓰다” 등 칭송만 있을 뿐이다.
상속세 12조원은 사상 최대다. 우리나라 연간 상속세의 3~4배 이른다. 하지만 이에 앞서 이재용 부회장은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배정을 시작으로 20여년에 걸친 편법상속을 통해 거대 그룹 삼성의 경영권을 승계한 ‘흑역사’가 있다. 상속세 12조원으로는 턱도 없다.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이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수감 중인 이 부회장은 현재 불법승계 혐의로 재판도 받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1조원 기부도 그 뿌리는 불법행위다. 2008년 4월17일 삼성 특검은 이건희 회장이 임직원 486명 명의를 동원해 차명계좌 1021개를 만들어 4조5천억원의 차명재산을 보유한 사실을 찾아내고 이 회장을 기소했다. 이 회장은 닷새 뒤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실명 전환한 차명재산 중에서 누락된 세금 등을 납부하고 남은 것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2009년 8월 조세포탈과 배임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형이 확정됐다. 그런데도 언론은 어둠은 가리고 빛만 조명한다.
<동아일보>가 4월30일 ‘단독’을 붙여 내보낸 기사 ‘생일선물 대신 ‘기부내역’ 달라고 한 이건희 회장’을 보자. 이 회장이 1991년부터 계열사 사장들에게 자신의 생일날 선물 대신 기부 활동을 적어 달라고 당부했다며 “이 회장은 매번 특별한 ‘생일선물’을 손꼽아 기다렸고 이 선물을 받은 뒤에는 어김없이 활짝 웃으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는 게 유족과 주변 지인들의 전언이다”라고 보도했다. 기사인가 위인전인가.
사실 왜곡도 차고 넘친다. <조선일보> 4월29일 사설 ‘반도체 전쟁’ 지휘할 사령관이 감옥서 상속세 대출상담 받는 나라’를 보자. “대부분의 선진국은 대주주 가족이 기업을 승계할 경우 세율을 낮춰주거나 세금 공제 혜택을 준다. 독일에선 이런 혜택이 적용될 경우 실제 상속세율은 4.5%까지 낮아진다. 일본도 가업 상속에 대해선 상속세를 유예·면제해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가업상속공제제도’를 들어 삼성이 독일이나 일본 기업이었다면 상속세가 대폭 감면됐을 거라는 주장인데, 사실이 아니다. 독일은 자산 2600만유로(350억원) 기업은 가업상속공제를 적용 받으려면 정부 심사를 거쳐야 하고 9000만유로(1210억) 초과분은 공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일본은 아예 비상장 중소기업만 대상이다. 우리나라도 가업상속공제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연간 매출액 3000억원 이하 중견·중소기업에 대해 상속세를 깎아준다. 삼성그룹의 2020년 기준 자산은 425조원이며 매출액은 400조원에 육박한다.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주장이다.
한국 언론이 ‘삼성 상속세’를 이유로 “시대착오적인 상속세를 손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29일, 바이든 대통령은 “이제 미국의 기업과 가장 부유한 1% 미국인이 그들의 공정한 몫을 지불할 때"라며 ‘부자 증세’를 선언했다. 코로나 극복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코로나가 부른 경제적 불평등 완화를 위해 소득세와 자본이득세 최고세율 인상 방침을 밝혔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독일 등 유럽 주요 국가들도 부자 증세에 나섰다. 한국 언론은 눈과 귀를 닫고 있는 건가.
‘찬양 기사’의 종착점은 어김 없이 ‘이재용 사면론’이다. ‘반도체 위기론’을 들어 이 부회장에게 우리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호소하던 언론은, 상속세 발표 이후에는 아예 대놓고 “최선을 다한 기업인에게 국가가 관용을 베푸는 건 ‘도리’”라며 사면을 요구한다. 이 부회장은 “정치적 희생양”이며 “감옥에 들어간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삼성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사면 얘기를 안 한다. 언론이 기대 이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 아닐까?
<중앙일보> 4월29일 칼럼 ‘이재용 사면론의 정치학’을 보자. 이 부회장의 사면을 요구하면서 “위대한 리더는 한 번의 결단으로 국민 가슴에 남는다. 문재인 대통령에겐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부디 진영을 넘어 나라를 구하시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이 부회장 사면은 문 대통령이 나라를 구할 마지막 기회라는 얘기다. 이 부회장이 이순신 장군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영화 <베테랑>에서 서도철 형사가 재벌 3세의 불법행위를 감싸는 동료 형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수갑 차고 다니면서 가오 떨어질 짓 하지 말자.” 찔리지 않는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정도껏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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