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문자를 알아야 책을 읽을 수 있다. 글을 모른다면 책은 그저 종이 뭉치에 지나지 않는다. 건축을 보는 관점도 그렇다. 그저 재료나 형태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글을 배우듯 건축의 다양한 표현 방식과 의미를 알게 되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나 의미를 읽을 수 있을 때 건축은 비로소 문화가 될 것이다.
12년 만에 양동마을을 다녀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후 혹 마을에 변화가 있을까 걱정도 되었고 번잡해지면서 사람의 온기가 사라질까 하는 두려움도 있어 통 가보질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약간의 편의시설이 생기고 주차장이 확장된 것 외에는 큰 변화가 없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집, 특히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옛집은 전국에 10채가량 있다는데 이곳 양동마을(경북 경주)에 무려 4채가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집이 월성손씨의 대종가인 서백당이다. 15세기 중후반 정도에 지어졌다고 하니 500년이 훨씬 넘은 고택이다. 종가의 살림이 지금도 이어지는 곳이라 외곽에서만 둘러보다 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서백당 주인의 호의로 내부까지 자세히 볼 기회를 얻었다.
서백당은 양동마을의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라는 분이 풍덕류씨 집안 외동딸에게 장가를 들면서 지은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가운데로 사랑채의 누마루가 보이고 집에 붙은 짧은 내외담이 보인다. 시야의 반은 집으로 채워지고, 반은 내외담 뒤 무성한 숲과 높게 앉아 있는 사당이 보인다. 사람들은 자연히 넓은 마당과 집 지을 당시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는 사당 쪽으로 향하게 된다. 마당으로 나아가면 사랑마루 이마에 달려 있는 ‘서백당’ 당호를 읽게 되는데,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쓰는 마음으로 살라는 의미라고 한다.
기대를 품고 처음 들어가 본 안채에는 먼저 네모난 안마당이 나오며 좌우로 부엌채와 사랑채가 에워싸고 있었고, 정면에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듯 품이 넓은 대청이 보였다. 큰살림을 관장하는 종갓집으로는 드물게 삼량집이며 대청 뒤편 바라지창도 검박하고 조촐한 판문을 달았다. 사랑채의 난간도 아주 단순하게 살을 엮어 만든 평난간이다.
통말집이라고 하는 미음자 형태의 평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집에 특별함이나 화려함은 없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아무런 허세도 없다. 그러나 위엄이 있고 격조가 있다. 엄숙과 평온이 공존하는 집. 언덕 위에 높이 있지만 사람을 내리누르는 위압감이 없는 집. 남에게 존경을 강요하지 않지만 저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집. 서백당 대청에 앉아 있자니 집을 지은 사람이 후손에게 전하고자 한 이야기가 조곤조곤 귀에 들어온다. 그리고 문득 시끄러운 세상이 저절로 고요해졌다. 서백당처럼 살고 싶다.
노은주·임형남 | 가온건축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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