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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홍콩에서 ‘영감’을 얻지 못했다

등록 2021-05-13 17:48수정 2021-08-19 15:20

정인환 l 베이징 특파원

후텁지근한 날씨에 연신 땀이 흘렀다. 베이징에선 먹통이던 ‘구글 지도’는 쌩쌩했다. 지하철 몽콕역에서 출발해 15분 남짓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새로 칠을 해야겠다 싶은 낡은 건물이었다.

비좁은 건물 들머리에선 경비원이 ‘장부’부터 들이댔다. 이름과 방문 목적, 들고 난 시간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10층에 올랐다. 한적하던 건물에 아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베이징에서 홍콩까지 약 2400㎞다. 비행기로 4시간, 고속열차로 10시간 남짓이 걸린다.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 베이징에서 볼 수 없는 것을 홍콩에선 볼 수 있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 30주년을 사흘 앞둔 2019년 6월1일이었다.

‘인민은 잊지 않는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숙연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전광판에 설치된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6·4 학살로부터 29년 362일 14시간38분 54초’째를 지나고 있었다. 30평 남짓한 공간에 관람객 50여명이 빼곡했다. 홍콩 시민사회가 오랜 노력 끝에 마련한 ‘6·4 기념박물관’이다.

리척얀(64) ‘애국민주운동 지지 홍콩시민연합회’(지련회) 주석은 박물관 한 귀퉁이 비좁은 사무실에서 웃고 있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홍콩 직공회연맹 비서장’과 ‘공당(노동당) 부주석’이란 직함이 적혀 있었다. 지련회는 1989년 5월 천안문의 젊은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홍콩 시민들이 모여 만든 단체로 해마다 6월4일 희생자를 기리는 촛불집회를 연다.

“우리 세대는 스스로를 ‘홍콩인이자 중국인’으로 여긴다. 6·4를 경험하면서 시민운동에 뛰어들었고, 홍콩의 민주주의는 물론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싸웠다. 반면 요즘 세대는 스스로를 ‘홍콩인’이라고 여긴다. 중국에 대한 반감은 ‘무관심’으로 표시한다. 문제는 중국의 민주주의 없이는 홍콩의 민주주의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2019년 6월9일 홍콩 시민 10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송환법 반대 시위의 시작이었다. 그해 8월 홍콩의 거리에서 다시 만난 리 주석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입고 나온 검은 셔츠에는 흰 글씨로 ‘인민은 잊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송환법 반대 시위 70일째를 맞은 8월18일 집회는 홍콩섬 중심가 빅토리아공원에서 열렸다. 퍼붓는 빗줄기 속에 집회를 마친 시민 약 100만명이 형형색색의 우산을 받쳐 든 채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듯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13주차로 접어든 8월31일 집회는 경찰이 불허했다. 시민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십자가를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했다.

“1980년대 홍콩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홍콩에서 영감을 얻은 광둥성 선전의 발전 모델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제 홍콩이 중국의 정치와 민주주의 발전에 영감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시간이 화살처럼 흘렀다. 홍콩 시민사회가 구의회 선거(2019년 11월)에서 승리한 것도 잠시였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중국은 홍콩판 국가보안법 입법(2020년 6월)과 선거 연기(7월), 선거제도 개편(2021년 3월) 등을 착착 밀어붙였다.

지난 4월16일 홍콩 민주파 원로 7명이 2019년 8월18일과 30일 불법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마틴 리(82) 민주당 창당 주석 등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지만, 이미 수감 중인 <핑궈일보> 창간 사주 지미 라이(73)에겐 추가 징역형이 선고됐다. 리 주석도 징역 14개월형을 선고받고 구속·수감됐다. 그가 희망한 ‘영감’에 대한 대답으로 보였다. 다시 6·4가 다가오고 있다.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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